류사경(柳思敬), 육유당공(六有堂公), Ryu, Sa-Gyeong, 생몰년:1556-1607, 세:22
宣祖刻 文臣. 忠景公派, 자 덕신(德新). 호 육유당(六有堂)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7대손이요, 진안현감 여강(鎭安縣監 如岡)의 손이며, 주부 혜(主簿 惠)의 아들로 명종(明宗) 11년 丙辰에 광주유등곡(光州 柳等谷)에서 태어났다.
공께서 태어난지 몇 달이 안되어 아버님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성품이 온순하고 지조가 정대하여 모친을 효성으로 섬기는 한편 마을 어른들을 공경하여 어긋남이 없었다. 9세에 어른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글 배우기를 청하더니 드디어 동향(同鄕)의 거유(巨儒)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을 사사(師事)하니 회재(懷齋)가 공의 학문에 독실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사위를 삼았다.
선조(宣祖) 18년 乙酉(1585)에 생원(生員)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머무르면서 포저 조익(浦渚 趙 翼), 상촌 신 흠(象村 申 欽),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으로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도의로서 사귀었다.
22년 已丑(1589)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억울하게 연좌된 사류(士類)들이 많았는데 공은 진사 정암수(進士 丁岩壽) 등으로 더불어 상소(上疏)로서 순역(順逆)의 의리를 들어 사류(士類)들을 구출하였다.
25년 壬辰(1592)에 왜란(倭亂)이 일어나자 처부 회재(懷齋)로 더불어 의리(義理)를 들어 고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양곡(糧穀)과 병기(兵器)등을 거두어 의병장 고경명(義兵將 高敬命)을 돕고, 본주(本州)에 머물러 창의사 김천일(倡義使 金千鎰)에게 서신을 띄어 방어책(防禦策)을 계진하였으며 본도관찰사 이 광(本道觀察使 李 洸)이 전장에 나서지 않고 머웃거림을 보고 난계 박종정(蘭溪 朴宗涎), 하곡 정운룡(霞谷 鄭雲龍)으로 더불어 상소로서 이 광(李洸)의 죄를 논하고 방어책을 갖추어 아뢰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수초(手莘)였다. 왕은 이를 가상히 여기시고 특명으로 도화서별제(圖晝署別提)를 제수하시었다. 그리고 丁酉(1597) 재란(再亂)에는 도원수 권 율(都元帥 權 慄)에게 토적(討賊)의 방략을 건의하여 채택됨이 많았었다.
34년 辛丑(1601)에 본군에 포충사(褒忠祠)가 건립되었는데 공께서 그 상량문(上梁文)을 지었으며, 처부 회재(懷齋)선생의 행장을 짓고 또한 그 충의(충義)를 나라에 상소하여 37년 甲辰(1604)에 드디어 의열사(義烈祠)를 건립, 향사(享祀) 주선하였다.
사우(士友)들로 더불어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춘추(春秋)로 강론하는 한편 거주하는 마을 양과리(良과里)에 정자를 지어 『良?洞亭』이라 이름하고 그 정기(亭記)를 지었다.
38년 乙巳(1605), 공의 나이 50세 되던 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제수되고, 이듬해 성균전적(成均典籍)으로 승진하여 8월에 예조좌랑(禮曹左郞)으로 전직되었는데 시기하는 무리들의 농간으로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고 마침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로는 세상에 나설 뜻을 끊고 시사(時事)를 일체 말하지 않고, 오로지 경적(經籍)을 탐구하며 시주(詩酒)로 소일하다가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선조(宣祖) 40년 丁未 10월 5일이었다.
묘소는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 건덕산 선영하 진좌(光山那 大村面 圓山里 連德山 先塋下 辰坐)에 모셔있다.
공은 평소에 "마음이 있으면 도맥(道脈)을 부지할수 있고, 뜻이 없으면 유건(儒巾)을 벗어야 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사업(事業)은 마침내 공자(孔子)와 안자(顔子)에 도달하기를 기약해야 한다. "하였다.
공과 종유(從遊)한 분들은 모두 일대의 유현(儒賢)들로서 언어와 문자 사이에 나타남이 많고, 향당(鄕黨)에서는 향선생(鄕先生)으로 추증한 바 되었다. 공은 저술(著述)이 많았는데 병란(兵亂)에 소실되고 다만 소장(疏狀) , 여문(?文) , 잡저(雜著) 약간편이 종가(宗家)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행장은 함양박신극(咸煬朴新克)이 짓고, 묘갈명은 안동권용현(安東權龍鉉)이 지었는데 지난 庚戌(1970)에 묘소의 제반 석의(石儀)를 갖추었다.
배위 음성박씨(陰城朴氏)는 즉 회재(懷齋)선생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고,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정걸(挺傑)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으며, 서자 1인이 있었다.
장자 적(適)은 진사(進士)인데 무후하고, 2자 술(述)은 호 애죽헌(愛竹軒)인데 외조 회재(懷齋)선생에게 글을 읽어 문행(文行)이 뛰어났더니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이 호소사(號召使)로 호남(湖南)에 내려와 의병을 모집할때 공이 소모유사(召幕有司)가 되어 동지로 더불어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거두어 전주(全州)에 이르러 화전(和戰)의 소식을 듣고 돌아왔으며, 3자 괄(适)과 4자 일(逸)은 무후하고, 5자는 선(選)이요, 사위는 옥천조원정(玉川趙元鼎), 탐진최인준(耽津崔仁俊)이다. 서자 달(庶子 達)은 젊어서 서석산(瑞石山)을 유람하다가 신인(神人)의 특이한 가르침을 받아 명의(名醫)가 되었더니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자 봉림대군(王子 鳳林大君)을 배종(陪從)하고 심양(溱湯)에 들어가 갖은 곤경을 겪으면서 충절을 다하였다. 왕자께서 유달리 사랑하더니 수년 후 귀국하여 왕위(王位)에 오른 후 즉시 불러 그 의술(醫術)을 시험하시고 관직을 내려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이르렀다.
※ 行狀, 丁巳譜, 朝鮮王朝實錄, 湖南節義錄,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