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모 (柳師模)

류사모(柳師模), 승지공(承旨公), Ryu, Sa-Mo, 생몰년:1750-1808, 세:26
正祖朝 文臣, 左相公派, 자 자용(子容).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11대손이요 이천부사 경소(利川府使 景紹)의 현손이요, 충청수사 형(忠淸水使 灐)의 장자로 영조(英祖) 26년 庚午 6월27일 고양(高湯)에서 태어났다.
정조(正祖) 원년 丁酉(1777)에 생원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있던 중, 11년 丁未(1787) 정월에 주상께서 대륜차(大倫次)를 비천당(丕闡堂)에 설치하고, 표문(表文)으로 생원 류사모(生員 柳師模)와 부시(賦詩)로 진사 김한동(進士金輪車)을 장원(壯元)으로 뽑아 전시(殿試)에 응하도록 특명을 내리셨다.
13년 己酉(178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수년 후 甲寅(1794) 11월, 조정에서 각읍(各邑)에 암행어사(暗行鄕史)를 파견하여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 공께서 경기도 금천(衿川) . 안산(安山) . 남양(南陽) . 인천(仁川) 고을로 나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데풀되 특히 흉년에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로써 21년 丁巳(1797) 정월에 주상께서 하교(下敎)에 이르기를 『탐라(耽羅) : 劑州島)에서 마필(馬匹)을 해마다 올려왔으나 임금이 탈만한 말은 예로부터 드물었는데 이제 목사 류사모(牧使柳師模)가 부임한 후로 진상(進上)해온 말은 임금이 탈만하니 이는 목(牧)을 설치한 이후 비록 처음 있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격려(激勵)하고 권장하는 도리로서 마땅히 상(賞)을 내리노라』하시고 공에게 내구마(內底馬)를 하사 하시었다. 그 후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옮겨 戊午(1798) 8월에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 되었더니 얼마 안되어 복직(複職), 승정원 우승지(承政院 右承旨)를 지내었다.
순조(純祖)께서 등극하신 후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가 인삼(人蔘)가격에 물의가 있어 3년 癸亥 12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8년 戊辰 7월23일 졸하니 향년 59세로 고양 선영하(高陽 先塋下)에 안장되었다.
배위 여흥민씨(驪興閔氏)는 체수(體洙)의 따님으로 무후하고,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형복(亨復)의 따님으로 1남을 두어 아들 환승(煥昇)은 진사(進士)이다.
후손은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驪州郡 北內面 注岩里)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