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온 (柳思溫)

류사온(柳思溫), 구정공(龜亭公), Ryu, Sa-On, 생몰년;1573-1639, 세:24
宣祖朝 倡義 崑山君派, 자 수보(粹甫). 호 구정(龜亭).

문하찬성 번(門下贊成 蕃)의 10대손이요, 증호조참의 순간(贈戶曹參議 純諫)의 아들로 선조(宣祖) 6년 癸酉 12월 1일에 대구 해안현(大丘解顧縣)에서 태어났다.
공이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더니 6세에 비로서 글을 배움에 한번 들으면 즉시 터득하여 어른들의 독촉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9세에 부친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성인(成人)과 같았고, 13세에 락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나이가 비록 어렸으나 덕의와 도량을 능히 갖추어 선생께서 심히 사랑하시고 아울러 크게 기대하였다. 이어 임하 정사철(林下 鄭師哲) 선생을 쫒아 경서(經書)는 물론 성리설(性理說)에 이르기까지 독실히 익히고 또 한강 정 구(寒岡 鄭 逑) ,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며 과거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의병장 권응수(業兵將 權應銖)로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 토벌을 모의하고 가재(家財)를 기우려 군량을 보급하는 한편 병기(兵器)를 제조하여 병영(兵營)에 조달하고 요새(要塞)를 지키면서 죽을 힘을 다하여 왜적의 예봉(銳鋒)을 꺾고 사로잡은 적병이 심히 많았다.
이렇듯 전공을 세움으로써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초유사 김성일(招諭使 金諸一)의 막하에 찾아가 군무(軍務)를 함께 토론하였다.
27년 甲午(1594)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을 여묘(廬墓)한 후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의병을 모아 경주에 있던 중 적병이 울산(蔚山)을 거처 영천(永川)경계까지 쳐들어 왔다. 권공응수(權公應?)가 본래 공의 방책 (方策)을 아는터라 서신을 보내어 동사(同事)할 것을 청함으로 공이 바로 합류, 계책을 상의하여 적을 무찔렀다. 동년 12월 권공(權公)으로 더불어 적병을 동해변(東海邊)까지 추격하던 차 마침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체찰사(體索使)로 경주(慶州)에 와서 머물고 있는지라, 찾아가 뵈옵고 토적(討賊)의 계책을 의논하여 깊은 찬사를 받았다.
이에 관찰사 한준겸(觀孼使 韓浚謙)과 어사 이상신(御史 李尙信)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초배(超拜)되었다.
난리가 끝난 후 서락재(徐樂齋)로 더불어 매월 모아서 경서(經書)를 강론하였는데, 때에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지주사(知奏事)로 도임하여 강석(講席)에 참석, 공의 재주와 학문을 보고 공경하여 마지 않았다.
戊申(1608)에 선조(宣祖)께서 승하하심에 공께서 대궐에 다달아 곡반(哭班)에 참여하고 광해군(光海君) 7년 乙卯(1615)에 서락재(徐樂齋)께서 돌아가심에 심상(心喪)의 예를 다하였다.
인조(仁祖) 2년 甲子(1624)에 이 괄(李 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께서 주상을 호위하고자 도보로 충주(忠州)에 이르러 반적(叛賊)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을 향하여 하례를 올리고 돌아왔다. 5년 丁卯(1627)에 후금(後金)의 대군이 쳐들어와 주상께서 몽진(蒙麗)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로 더불어 창의(倡義), 북상하던 중 강화조약이 성립되자 통곡 끝에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만년에 구암산(龜巖山) 아래로 이거하여 자그마한 정자를 지어 구정(龜亭)이라 자호하고 이곳에서 여년을 보내다가 17년 己卯 12월 22일에 향년 67세로 돌아가시니 이듬해 2월 20일 인동 유학산 선영하 해좌(仁同 留鶴山先榮下 亥坐)에 안장되었다.
 배위 양성이씨(陽城李氏)는 훈련원정 설(訓鍊院正 枻)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어 아들은 여장(汝樟) , 여재(汝梓). 여백(汝栢). 통제사 여강(統制使汝橿)이요, 따님은 김참(金慙), 곽희안(郭希顔)에게 출가하였으며, 후취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익주(益柱)의 따님인데 2남 3녀를 두어 아들은 주부 여송(主簿汝松) , 여추(汝楸)요, 따님은 김의(金誼) , 민여효(閣汝孝) , 민증효(閔曾합孝)에게 출가하였다.공의 유집(遺集)이 있고, 후에 아들 여강(汝橿)의 귀히 됨으로 인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공의 행장은 익찬 풍산류심춘(翊贊 豐山柳尋春)이 짓고 묘갈명은 참봉 청주정규석(參奉 淸州鄭奎錫)이지었으며 공의 사행이 대구음지(大邱邑誌)에 실려있다.
후손이 대구시(大邱市) , 칠곡군(漆谷郡) , 전주시(全州市) , 남원군(南原郡) , 삼랑진(三浪津)등지에 세 거하고 있다.
※ 行狀 : 墓碣銘.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