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신(柳士信), 수신재공(守愼齋公), Ryu, Sa-Sin, 생몰년:1560-1631, 세:21
宣祖朝 行誼 貞肅公派, 자 여실(汝實). 호 수신재(守愼齋).
형조참판 수강(刑曹參判 守剛)의 6대손이요 부사직 한(副司直 漢)의 아들로 명종(明宗) 15년 庚申생인에 천성이 순후하고 강직하여 남과 더불어 사귐에 충후(忠厚)하였으며 학문에 근실하고 행실이 독실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문음(文蔭)으로 출사하여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에 이르렀다, 한양에 살면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과 종유(從遊)하는 한편 율곡 이 이(栗谷 李 珥)의 문하에 출입하며 격몽요결(擊蒙要訣). 근사록(近思錄)등 여러 책을 탐독, 자신을 깨우침에 정성을 다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평산(平山) 진보산하(眞寶山下)로 자취를 감추어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바르게 행하므로써 향속(鄕俗)을 순화하는 근본을 삼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독실히 행하므로써 자제들을 가르치는 요체를 삼았다. 일찌기 가훈사조(家訓四條)를 써서 벽에 걸어놓고 자손을 가르쳤는데 그 글에 "첫째 충효(忠孝)는 복록과 경사의 기초이다. 대승공(大丞公)께서 얼음같은 마음과 옥같은 지조로 충성을 다하여 그 후손이 더욱 창성하였고, 정숙공(貞肅公)께서 세종(世宗)의 지우(知遇)를 받고 곧은 지조로서 성의를 다하여 후인(後人)들을 계도(啓導)하였으며, 둘째, 선조를 효성으로 받들고 손님을 예의로써 접대할 것이며, 셋째, 고을에 살면서 세가지 근심이 있으리니 입 조심하기를 반드시 병(甁)과 같이 할 것이며, 넷째, 친척간에 돈목하고 이웃간에 화목해야 할지니라"하시었다. 그리고 혼취(婚娶)를 돕고 곤궁한 이를 구제하며 질병(疾病)을 구원하여 남과 다툼이 없이 어진 사랑을 베푸니 그천성의 발로였다.
임종(臨終)에 부인 윤씨(尹氏)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아이들이 어리니 모름지기 잘 가르쳐 집안을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시요"하고 조용히 돌아가시니 때는 인조(仁祖) 9년 幸未 10월 13일로 향년 72세였고 평산군 세곡면 운봉리 산영현 축좌(平山郡 細谷面 雲峰里 山永峴 丑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단운 민병승(丹雲 閔丙承)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다.
배위 거창신씨(居昌申氏)는 우후 인(處候 寅)의 따님으로 무후하고,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참봉 경의(參奉 景毅)의 따님으로 역시 무후하고,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직장 은로(直長 殷老)의 따님으로 2남을 두었다.
장남 경(儆)은 자 군성(君誠)인데 선조(宣祖) 41년 戊申생으로 배위 제주고씨(濟州高氏) 통정 경방(通情 擎邦)의 따님과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어 복기(復起). 복흥(復興). 복진(複振)과 평산신대방(平山申大防). 임명석(任命錫)은 그 아들과 사위이다.
차남 협(俠)은 자 이직(而直)이요 호 승훈당(承訓堂)이니 광해군(光海君) 2년 庚戌생으로 모친 윤씨의 교양을 받고 일찌기 부친께서 남기신 가훈사조(家訓四條)를 익히 실행하여 평생에 어김이 없었다.
이에 온 고을에서 공의 행실을 본받고 드디어 유림(儒林)에서 나라에 천장(薦狀)을 올려 공의 행의(行誼)를 기리었다. 배위 한양조씨(漢陽趙氏) 식(軾)의 따님과 사이에 2남을 두어 복선(復善)과 복삼(復三)이다.
공의 후손은 평산군 세곡면 진보동(平山郡 細谷面 眞寶洞)에 세거하고 있다.
※ 墓碣銘. 家狀.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