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원(柳思瑗), 문흥군(文興君), Ryu, Sa-Won, 생몰년:1541-1608, 세:20
宣祖朝 功臣, 府尹公派, 자 경오(景悟)
목포만호 증병조참판 질(木浦萬戶 贈兵曹參判 秩)의 아들로 중종(中宗) 36년 辛丑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명종(明宗) 22년 丁卯(1567)에 생원 진사 양시(生員 進士 兩試)에 급제하고 선조(宣祖) 18년 乙酉(1585)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과명(科名)은 응룡(應龍)이었고 후에 개명(改名)하였다.
처음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가 후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량(兵曹佐郞)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가 얼마후 파직을 당하였다.
25년 壬辰(1592)에 왜적이 침입하여 왕세자(王世子)가 피란, 성천(成川)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공이 도보로 가서 뵈옵고 바로 병조좌랑(兵曹佐郞)에 복직되었다. 얼마 안되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가 어가(御駕)가 청천강(淸川江)을 건널때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봉례(奉禮)로 전직되었다가 바로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는데 때에 난리를 처음 겪는 터라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굶주리고 허덕임으로 공께서 진무(鎭撫)를 잘하여 그에 힘입은자 심히 많았었다.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를 거쳐 28년 乙未(1595) 8월 호조정량(戶曹正郎)에 제수되고 이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이듬해 차사(差使)로 제주도(濟州島)에 가서 백성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돌아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30년 丁酉(1597)에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에 옮겼는데 당시 왜장 가등청정(倭將 加藤淸正)이 군사를 몰고 다시 침입하였다. 공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정사 정기원(正使 鄭期遠)과 함께 원병(援兵)을 청하러 명 (明)나라에 갔는데 병부상서 석 성(兵部尙書 石 星)이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출병(出兵) 할 뜻이 없어 거짓으로 발병(發兵)한다 하고 회자(回咨)를 주면서 먼저 돌아가라 하였다. 공이 "이는 사인(私人)의 자문(咨文)으로 필시 위조(僞造)이다. 만약 원병(援兵)을 보내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뼈를 묻을지언정 죽어도 두렵지 않다."하였다. 얼마 후 과연 거짓이 분명한지라 정사(正使)로 더불어 중신(重臣)들을 설득하고 바로 중문(重門)에 나아가 삼주야(三晝夜)를 통곡하니 명제(明帝)가 신포서(申包胥)의 충의(忠義)에 비기고 그 성의에 감동하여 드디어 마귀(麻貴)와 양호(楊鎬)를 대장(大將)으로 삼아 원병(援兵) 10만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창황하고 급박한 즈음이라 사명(辭命)을 저작(著作)할 사람이 없었는데 초안(初案)에서 윤색(潤色) , 정사(淨寫)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모든 문서(文書)가 다 공의 솜씨로 이루어져 사어 (辭語)가 간결한지라 명(明)나라 조정의 관원들이 감동하고 귀 담아 들었다.
동년 6월에 사명(使命)을 마치고 환국(還國)하자 조정에서 포상(褒賞)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려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제수하고, 이어 호조함의(戶曹參議)에 전직되었다.
동년 겨울에 명(明)나라의 원군(援軍)이 들어옴에 공께서 그들을 맞아 영남(嶺南)까지 수행하였다. 이듬해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34년 辛丑(1601) 4월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가 지성으로 다스리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37년 甲辰(1604) 6월 조정에서 공이 청병(請兵)에 유공(有功)하였음을 들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함과 아울러 문흥군(文興君)을 봉하고 일계(一階)의 관작을 승진시킴과 동시에 그 부모 처자에게도 또한 일계(一階)를 초과하는 특전을 내리었다. 그리고 노비(奴婢) , 전답(田畓) , 은자(銀子) , 내구마(內廏馬)등을 하사하고 도형(圖形)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5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어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39년 丙午(1606)에 명 (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북방의 오랑캐들이 침범할 기미가 있었다. 공은 예부(禮部)에 호소하여 마침내 명(明)나라에서 차사(差使)를 보내어 오랑캐를 효유(曉諭)케 하고 환국함에 조정에서 품계를 올려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하였다.
41년 戊申(1608)에 선조(宣視)께서 승하(昇遐)하시어 국장(國葬)을 치를적에 공이 병석(病席)에서 일어나 백관(行官)을 따라 도성(都城)밖에 나가 곡송(哭送)코자 하니 집안 사람들이 말리었다. 공이 정색(正色)하고 "군부(君父)께서 돌아가셨는데 감히 집에 누워 있겠는가, 가령 수년을 더 산다한들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 드디어 갔더니 이로 인하여 병세가 악화되어 동년 6월 14일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였다. 나라에서 조제(吊祭)를 의례대로 행하고, 동년 8월에 고양 아연리 선영(高陽 阿延里 先塋)에 안장되었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고, 집에 있어서나 사람을 접함에 한결 화락하여 성내는 빛을 나타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용모를 보고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부모를 섬기되 효도를 다하고 누이 한분이 계셨는데 우애를 다하였고 친족을 대함에 화목이 지극하였다.
배위 철원최씨(鐵原崔氏)는 무후(無后)하고,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정헌공 몽량(定獻公 夢亮)의 따님이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누이로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부(敷)는 음사(蔭仕)로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을 거쳐 청양(靑陽) , 토산(兎山) , 안음(安陰)고을의 현감(縣濫)을 지냈으며, 사위는 감사 함평이배원(監司 咸平李培元)이다.
공의 묘지(墓誌)는 처남(妻男)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짓고, 묘갈명(墓碣銘)은 오당 이상수(珸堂 李象秀)가 지었다.
공의 후손이 고양(高陽) 당진(唐津)에 세거하고 있다.
※ 朝鮮王朝寶錄, 國朝榜目, 墓誌, 珸堂集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