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재(柳尙載), 대사간공(大司諫公), Ryu, Sang-Jae, 생몰년:1644-1703, 세:22
肅宗朝 文臣, 夏亭公派, 자 유원(悠遠). 호 관은(灌隱).
부제학 희저(副提學 希淸)의 5대손이요, 좌랑 증영의정 성오(佐郞 贈領議政 誠吾)의 2자로 인조(仁祖) 22년 甲申 3월10일생이다.
어려서부터 미목(眉目)이 아름답고 기품(氣稟)이 맑아 겨우 5세에 어른들을 따라 반드시 제사에 참사하니 조모 홍씨(祖母 洪氏)께서 그 밤중에 일어나는 것을 민망히 여겨 한두번은 깨우지 않았는데 그 뒤로부터는 반드시 옷을 단정히 입고 등불을 밝힌 뒤에 앉아서 행사를 기다리는지라 조모께서 더욱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시었다. 한편 글재주가 뛰어나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힘써 보통사람이 미치지 못하였다.
13세에 모친을 여의고 슬퍼함이 성인과 같으므로 조객(吊客)이 그 예절과 효성에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17세에 결혼한 후로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중용(中庸)을 읽었는데 선생께서 권장하여 이르기를 "내가 연소한 생도들을 많이 가르쳤는데 총명하고 민첩함이 이 같은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하였다.
현종(顯宗) 7년 丙午(1666)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I5년 甲責(1674)에 부친 상을 당하여 이듬해 백씨(伯氏)를 따라 모산(茅山)옛집으로 돌아와 예제(禮制)에 쫒아 거상(居喪)하였다.
숙종(肅宗)9년 癸亥(1683)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여름 한원(翰院)에 선입되었더니 투소(投疏)가 있어 파직되고, 12년 丙責(1686)에 복직(復職),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전적(興籍). 감찰(監察).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등을 역임하고, 14년 戊辰(1688) 봄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발탁되었다가 발로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
이듬해 정월 도당(都堂)에서 유능한 문신(文臣) I5인을 선발하였는데 공께서 그중에 뽑혀 홍문록(弘文錄)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곧 바로 환국(換局)이 일어나자 백씨(伯氏)와 함께 광주 율현촌(廣州 栗峴村)으로 돌아와 한 집에 거처하며 형제의 우의를 독실히 하였다.
16년 庚午(1690)에 해남현감(海南縣監)에 제수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19년 癸酉(1693) 여름에 관직을 그만두고 나주 모산촌(羅州 茅山村)으로 돌아왔더니 이듬해 여름에 정언(正言)에 특배(特拜)되어 그로부터 수찬(慘撰). 교리(校理). 필선(弼善). 보덕(輔德). 사간(司諫). 집의 (執義). 사성(司成). 제용감정(濟用監正). 동학교수(東學敎授)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21년 乙亥(1695)에 응교(應敎). 사인(舍人).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낸 후 부제학(副提學)에 천거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전에 장자(長子)의 상(喪)을 당하여 얼마 후 부임 24년 戊寅(1698)가을에 교체되고, 이어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전임하여 오래지 않아 병으로 체임되었다.
이듬해 봄에 정주목사(定州效使)로 나가고, 27년 辛巳(1701) 여름에 여주목사(驪州效使)로 나갔다가 이해 겨울에 관직을 버리고 광주 율리(廣州 栗里)로 돌아와 백씨 의정공(議政公)을 쫒아 동실지락(同室之樂)을 다하였다.
29년 癸未(1703) 정월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4월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거듭 제수되었으나 숙환(宿患)이 발발하여 점점 위독하므로 승명(承命)치 못하고 동년 6월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이었다. 동년 8월에 양천(陽川) 남쪽 장군소면 신기리 선영 해좌원(將軍所面 新機里 先機 亥坐原)에 장례를 모셨다.
공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나의 선조(先祖)와 선군(先君)께서 모두 청렴과 검소함으로 세상에 명망이 있었는데 나에 이르러 어찌 감히 그 이름을 더럽히겠는가?"하고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냈으나 전답(田畓) 한 두락도 보탬이 없었고 가택(家宅)도 다만 초가 몇 칸이었으며 체임(遞任)때의 행장(行裝)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집안 뜰이 좁아 말 한필을 매어 둘 자리가 없었고, 깨어진 질 그릇에 몇 떨기 꽃을 심어 놓았는데 어느날 한 재상(宰相)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금일에 영공(令公)의 화초(花草)를 보니 내 마음이 흐뭇하다"하였다.
배위 은진송씨(恩津宋氏)는 도사 국신(都事 國藎)의 따님인데 인조(仁視) 20년 壬午(1642)생으로 숙종(肅宗) 20년 甲辰(1694) 7월에 나주 모산촌(羅州 茅山村-현행정구역-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3세였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하고 처사(處事)가 온후하여 부군(夫君)을 섬기고 축리(妯娌)를 대함에 의리로써 행하였다.
매우 가난하였지만 일찌기 근심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행실이 근엄하므로 종당(宗黨)에서 여중군자(女中君子)라 일컬었다. 2남2녀를 두어 아들 봉정(鳳庭)은 통덕랑(通德郎)이요, 봉령 (鳳齡)은 목사(牧使)이며, 사위는 청주 한중혁(淸州韓重燃)과 진사 함평이익수(進士 咸平李益壽)이다.
공이 돌아가신 10년 후에 신기리 선영(新機里 先塋)에 소재한 부군 묘소에 합점폄하였다. 영의정 오천이종성(領議政 梧川 李宗城)이 묘갈명을 지었다.
戊申(1968)에 이천군 설성면 암산리 경좌(利川郡 雪星面 岩山里 庚坐)로 묘소를 옮겨 합부하였다.
※ 朝鮮王朝寶錄 墓碣銘.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