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렬 (柳相烈)

류상렬(柳相烈), 항일독립투사(抗日獨立鬪士), Ryu, Sang-Ryeol, 생몰년:1886-1922, 세:32.
貞肅公派, 字 : 良佐.

홍문관전한 팽석(弘文館典翰 膨碩)의 후예로 수신재 사신(守慎齋 士信)의 11대손이요, 몽와 흥원(夢窩 興源)의 증손이요, 기영(基永)의 손이요, 근엽(根燁)의 장자인데 백부 매우당 근민(梅友堂 根敏)의 자로 출계하였다.
고종 23년 12월 28일 평산 문임(平山 門巖)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기개(氣槪)가 호탕하여 매양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혹 싸우면 반드시 이기었다. 점점 자람에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여 경서(經書)에는 별로 힘쓰지 않더니 서사)書史)를 간략히 읽어 대의(大義)만은 통하였다.
출계하여 가시를 주관함에 봉사(奉祀)와 접빈(接賓)을 자못 넉넉히 하고, 시여(施與)를 즐기어 의리에 마땅하면 창고를 기울여서 돕는 등 자못 고인(古人)의 기절 위행(奇節偉行)을 사모하고, 세상의 영리(榮利)로써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일합방 이후로 항상 우울하고 강개하더니 기미년(1919) 3월에 고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평산(平山)에서 만세 시위를 주동하고 왜인의 주재소를 습격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한독립단장 조맹선(趙孟善)의 밀명을 받고,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권총 80정을 수입 귀국하여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고 동지들에게 분급한 동시에 여러 고을로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 군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보내다가 염탐하는 왜경에게 포위되자 왜경 나까무라(中村)를 사살하고 드디어 그들에게 체포 당하였다. 그러나 일언도 굴복하지 않고 다만 저들의 금수같은 무지와 우리 강상(綱常)의 대의를 역설하며, 온갖 고초를 겪으니, 보고 듣는 이마다 입을 다시며 『참으로 대장부로다. 의기(義氣)의 축적이 아니면 몸을 돌보지 않음이 능히 이 같겠는가?』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거의 1년을 옥에 같혀 있으면서 집에 왕복한 서한이 몇통이 있었는데, 조금도 뉘우치거나 원망함이 없고, 다만 노모께서 생존하시는데 능히 종양치 못하고 불효의 죄를 면치 못함을 말하는 한편 아내에게 존고(尊姑)를 잘 공양하고 아이들을 잘 가르치라는 부탁이 있을 따름이었다.
옥중에 있으면서 시(詩) 1수를 지어 남겼으니 그 시에
『문천상이 죽은 뒤에 연옥만 남았으니
몇사람이 이곳에서 심장을 찢기었나,
청춘을 헛 보내고 봄만 홀로 떠났으나
응당 고산에는 송죽만 푸르리라』
(天祥死後餘燕獄幾人到此裂心腸
未伴靑春春獨去應在故山松竹蒼)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고 1922년 7월 6일 서흥(瑞興)에서 처형되니 당시 나이 37세였다. 2백리 길을 반장(返葬)하여 평산군 세곡면 문암리 송전동 동록 조고(祖考) 묘소 왼쪽 등어리 간좌(艮坐)에 모셔졌다. 이때 황해도내 인사드리 수없이 호상하고 장례일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부곡(赴哭)이 그치지 않았으며 왜인들의 정탐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십수의 만사(挽辭)가 답지하였다.
족인 봉양 인호(族人 鳳陽 寅鎬)씨가 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는데 그 명(銘)에 이르기를
『그 재주가 걸특하고, 그 의리가 영렬했도다.
나라가 멸망함에 당하여 흉도들이 날뛰었도다.
독립에 죽음을 기약하고 내 뜻을 이미 결심했도다.
체포되어 힘은 굴했으나 그 말은 오히려 곧았도다.
평양 감옥에 갇혔다가 서흫시장에서 죽었도다.
그 지킴을 뺏기지 않고 그 지조를 꺾이지 않았도다.
끝내 지킨 한 절의는 죽었어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인간 본성의 발로로써 누군들 슬퍼하지 않으리요.
문암의 저 무덤은 푸른 피를 간직했도다』
(其才也傑其義也烈, 國値亡滅兇徒?突, 獨立死結吾志己決, 被執力屈猶直其舌, 平豻縲絏柴市同轍, 其守不奪其操不折, 始終一節至死不沒, ?性所發孰不悽咽, 門巖之穴藏此碧血)
배위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주사 천정(天楨)의 따님으로 1882년 6월 7일생인데 4남 1녀를 두고, 졸일(卒日)과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아들은 재하(在河), 재덕(在德), 재훈(在勳), 재철(在哲)이요, 딸은 신천 강덕기(信川 康德基)에게 출가하였다.
지난 1963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단장(單章)』이 추서(追敍)되었다.

※ 墓誌銘, 韓國獨立運動史.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