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세홍(柳世泓), 금천공(金川公), Ryu, Se-Hong, 생몰년:1536-1597, 세:20
宣祖朝 倡義, 忠景公派, 자 심원(深源) 호 금천(金川)
반곡 적(盤谷 績)의 4자 호군 순손(護軍 順孫)의증손이요, 인상(麟祥)의 손이요, 판관 희필(判官 希畢)의 아들로 중종(中宗) 31년 丙申에 함양 안의 (咸陽 安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침착하여 아이들과 장난을 하지 않고, 겨우 6 , 7세에 문학을 좋아하고 서예(書藝)를 열심히 익히니 사람들이 기특히 여기었다. 한편 부모를 섬기되 지극히 효성스러워 분모의 뜻을 순종하므로 힘쓰고 화평하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었으며 말이 진실하고 행동이 독실하였다. 장성하자 문장이 뛰어나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경시(京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관로(官路)에 뜻을 끊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깊이 사모하여 날마다 경서(經書)를 열람하는 한편 종씨(從氏) 신계 세한(申溪 世漢)을 쫓아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궁리 격물(窮理 格物)의 요체(要諦)를 얻었다. 당시 역양 정유명(嶸陽 鄭惟明) , 고산 조효박(孤山 趙孝博) 등 명유(名儒)들이 공의 침착하고 굳센 지조와 성실하고 돈독한 효성을 모두 추중하여 마지 않았다.
선조(宣祖) 16년 癸末(1583)에 연이어 고비 상(考鈗 喪)을 당하여 초종(初終)의 의절(儀節)을 가례(家禮)대로 쫓아 그 성의를 다하고 상중(喪中)에 오직 죽(粥)을 먹으며 소채(蔬菜)와 수장(水漿)을 입에 넣지 않았으며 성묘(省墓)를 하루도 폐하지 않았고 비록 매서운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우마(牛馬)를 타지 않고 도보로 성묘하였다.
26년 癸巳(1593)에 온 나라가 난리속에 흉년마저 겹쳐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때 공은 죽을 쑤어 나누어 주고 혹 재물을 내어 백성들을 구원하니 그에 힘입어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30년 丁酉(1597)에 왜적이 재침(齋侵)하여 고을을 함락하자 당시 늙은 나이로 안의현감 곽 준(安義縣監 郭 逡) , 함양군수 조종도(咸陽郡守 趙宗道)로 더불어 굳게 방어할 것을 기약하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황석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가 적과 맞서 싸우는데 김해부사 백사림(金海府使 白士霖)이 출전대장(出戰大將)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보전코자 밤중에 적병을 끌어들여 온 성중(城中)을 유린하니 도저히 막을 계책이 없었다. 이에 공께서 두 아들로 하여금 모친을 업고 성(城)을 빠져 나가도록 하니 장자 강(橿)이 도로 들어와 공에게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의 한번 죽음은 이미 성에 들어오던 날 결심하였다.』하니 강(橿)이 울면서 『아버님께서 이미 순국(殉國)할 충의가 있는데 자식으로 어찌 아버님을 따라 죽을 효도가 없겠읍니까?』하였다. 잠시후에 적군이 칼을 들어 공을 치자 강(橿)이 몸으로 덮치다가 드디어 부자가 한 칼 아래 죽고, 차자 하(槾)는 이에 앞서 모친을 등에 업고 성을 나가 피하니 동년 8월 18일로서 공의 나이 62세였다.
동계 정 온(桐溪 鄭 蘊)이 공의 전(博)을 지었다.
배위 진주류씨(晋州柳氏)는 부장 희춘(部美 希春)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강(橿)과 하(?)이며 사위는 거창유의갑(居昌 劉義甲)이다.
묘소는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석반동 선영하 간좌(咸陽郡 安義面 鳳山里 石盤洞 先塋下 艮坐)에 있다.
※ 傳 , 丁巳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