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세온 (柳世溫)

류세온(柳世溫), 임호공(臨湖公), Ryu, Se-On, 생몰년:1575-1632, 세20
仁祖朝 武臣. 掌令公派, 자 사순(士順), 호 임호(臨湖)

회덕현감 맹지(懷德縣監 孟智)의 6대손이요, 첨정 영춘(僉正 榮春)의 아들로 선조(宣祖) 8년 乙亥생인데 천성이 영특하고 풍채가 늠름하여 조그마한 절차에 구애하지 않았다. 일찌기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문사(文詞) 가 일찍 드러나므로 동문(同門)에서 모두 공의 재덕(才德)을 감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공의 나이 18세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의 막하(幕下)에 참여하여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장의공 이윤서(壯毅公 李胤緖)로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27년 甲午(1594)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무산첨사(茂山僉使)를 지냈는데 변진(邊鎭)이 조용하고 군무(軍務)가 정연하였다. 연일현감(延日縣監)으로 전임하여 청렴 결백하게 정사를 처리함에 관리와 백성들이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공이 비록 무관(武官)이었으나 교루는 다 당세의 대학자였으니 즉 동계 정 온(桐溪 鄭 蘊)등으로 더불어 동화록(同和錄)이 있고, 또 11인으로 더불어 낙성(洛城)에서 종유하여 동도계회록(同道契會錄)이 있다.
이괄(李适)이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있을 때, 공의 뛰어난 재략(才略)을 알고 자기의 막료(幕僚)가 되어주길 청하였으나 끝내 불응하므로 드디어 죄를 청하여 용천(龍川)에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께서 기미에 밝고 마음이 발랐던 것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인조(仁祖) 10년 壬申에 돌아가시니 향년 58세로 초계군 북면 다라곡 임좌(草溪郡 北面 多羅谷 壬坐)에 모셔졌다.
배위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군수 천조(郡守 天祚)의 따님으로 1남을 두고, 옥산장씨(玉山張氏)는 죽정 잠(竹亭 潛)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장자 경문(慶門)은 부사용(副司勇)이요, 2남은 몽성(夢星)이다.
방후손 승기(傍後孫 昇基)가 행장을 짓고 승지 안동권대긍(承旨 安東權大肯)이 묘갈명을 지었다.
※ 墓碣銘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