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원(柳誠源), 충경공(忠景公), Ryu, Seong-Won, 생몰년: ?-1456, 세:16
端宗朝 節臣. 中門祇候使公派, 사륙신, 자 태초(太初). 호 낭간(?玕)
의정부사인 사근(識政府舍人 士根)의 3자인데 일찌기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세종(世宗) 26년 甲子(144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저작량(著作郎)으로 의방류취(醫方類聚)의 편찬에 참여하고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있으면서 29년 丁卯(1447)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서 명망이 일세 (一世)에 떨치었다.
이때에 송사(宋史)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지 않아 송조(宋朝)의 사기(史記)에 어두웠었는데 하루는 집현전에서 제신(諸臣)들이 송조(宋朝)의 인물을 평론하였다. 어떤이가 말하기를 『송사(宋吏)를 지음에 왕안석 (王安石)이 마땅히 어느 전(傅)에 있어야 하겠는가?』하니 제신들이 모두 『마땅히 간신전(奸臣傳)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이에 공께서 반박하여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이 신법을 만들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소인(小人)이나 그러나 안석의 문장(文章)과 절의(節義)는 가히 칭송할것이 있고, 그 본심(本心)은 일찌기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천하를 그릇친 것은 다만 우활(迂闊)하고 집요(執拗)하여 소인을 끌어 드렸으나 진회(秦檜)와 채경(蒙京)의 무리로 비함은 불가하고 열전(列傅)에 있어야 합당하다. 』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송사(宋史)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데 과연 왕안석(王安石)이 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었다. 공이 기뻐하고 말하기를 『옛적 주자강목(朱子綱目)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익재이 선생(益齋李 先生)이 자치통감(資治通鑑) 중에 무후기(武后紀)를 읽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어찌 주(周)나라의 여분(餘分)으로 당(唐)나라의 일월(日月)을 이을것인가"하더니 후에 강목(綱目)을 얻어 보고 주자(朱子)께서 과연 주(周)나라를 내치고 당(唐)나라를 높인 것을 알고서 익재선생께서 자못 자부(自負)하였다 성원(誠源)이 감히 익재선생을 비함은 외람하나 그대들의 항복을 받았도다. 』하였다.
문종(文宗) 즉위 후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傅) 편찬에 참여하고 세자시강원좌사경(世子侍講院左司經)에 보직되어 이극감(字克堪)과 함께 세자를 교도(敎導)하는데 힘을 다하고 집현전지제교(集賢殿知製敎)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임하여 세종실록(世宗寶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단종(端宗) 즉위 후에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 장령(掌令)을 역임하면서 언로(言路)의 개방을 극력 주장하고 2년 甲戌(1454) 정월에 궁성(富城)안에 불당(佛堂)을 건립함은 불가하다고 상소로서 주장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에 전임하여 사예(司藝), 사성(司成)으로서 승문원지사(承文院知事)를 겸하고 문종실록(文宗寶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당시 단종께서 유충(幼冲)함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집정(執政)하여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등을 죽이고 드디어 그 공훈(功動)을 포상하고자 교서(敎書)의 작성을 집현전(集賢殿)에 의뢰하였는데 집현전의 학사(學士)들이 모두 도망하고, 공만이 홀로 불잡혀 협박끝에 교서(敎書)를 기초하고 집에 돌아와 통곡하니 가인(家人)들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였다.
얼마 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여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영월(寧越)로 쫓겨나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김질(金?)의 고변(告變)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께서 말을 채찍질하여 급히 집으로 돌아와 부인과 술잔을 들어 작별한 후 관대(冠帶)를 벗고 가묘(家廟)에 들어가더니 오랬동안 나오지 않는지라. 가인(家人)이 괴이하게 여기고 가서 보니 공께서 엎드려 칼로 자결(自決)하여 있었다.
얼마후에 이속(吏屬)들이 와서 시체를 거두어 가버리니 때는 세조(世祖) 2년 丙子 6월초 2일이었다.
뒤이어 공의 아들 귀연(貴連)과 송연(松連)이 잡혀 참살 당하고 형 별시위 효원(別侍衛 孝源) , 아우생원 충원(生員 忠源) , 별좌 신원(別坐 信源) , 현감 경원(縣監 敬源)과 장질 정언 계분(正言 桂芬)이 모두 연좌(連坐)되어 혹은 죽고 혹은 유배(流配)되었다.
동월 7일 의금부(義禁府)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허조(許慥) , 박팽년(朴彭年)과 공의 시체가 거열효수(車裂梟首)되고 그 친자는 교살(絞殺)되고. 형제 , 자매 , 처첩등은 변방 잔읍(殘邑)으로 내쫒겨 노비(奴婢)가 되고, 백숙부모 형제(伯叔父母 兄弟)의 아들은 원방(遠方)으로 내쫒겨 노비(奴婢)가 되었다. 그리고 공의 소유인 광주(廣州)에 있던 전장(田庄)은 계양군 이증(桂陽君 李增)에게, 청주(淸州)에 있던 전장은 도승지 한명회(都承旨 韓明澮)에게 각기 몰수당하였다.
공께서 임종시에 읊은 시조 일수(時調 一首)가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소저 의금부제명기(義禁府題名記)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고 있다.
숙종조(肅宗朝)에 설원(雪寃)되어 절의공(節義公)으로 시호가 내리고, 영조(英祖) 34년 戊寅(1758)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과 아울러 충경공(忠景公)으로 개시(改諡)되었다.
공은 사육신(死六臣)중 일인으로 각처 사우(祠宇)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과천 민절서원(果川 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洪州 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連山 忠谷書院). 대구 낙빈서원(大邱 洛濱書院). 의성 충렬사(義城 忠烈祠). 영월 창절사(寧越 彰節祠)등이다.
순조(純祖) 11년 辛未(1811) 4월 나라에서 봉사손(奉祀孫)을 세우라는 특명이 있었는데 18년 戊寅(1818) 6월에야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공의 재종형 생원 인흡(再從兄 生員 仁洽)의 12대손 양기(洋淇)로 봉사손(奉祀孫)을 삼을 것을 청하는 예조(禮曹)의 입안(立案)이 있었고, 고종(高宗) 39년 任寅(1902) 2월에 경기도 유생(儒生)들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봉사손(奉祀孫)을 세우라는 어명(御命)이 내려 시흥(始興)에 거주하는 공의 삼종 감찰 승조(三從 監察 承祖)의 14대손 기찬(基纘)으로 봉사손을 삼았다.
고종(高宗) 년 戊辰(1868), 서원 훼철령(書院 毁撤令)에 의하여 각처의 사우(祠宇)가 모두 훼철되고 오직 영월 창절사(寧越 彰節祠)만 보존되었으며, 공주 숙모전(公州 肅慕殿)이 복설되고, 노량(鷺梁)에 의절사(儀節祠), 남원(南原)에 강촌사(江村祠), 시흥(始興)에 충경사(忠景祠)가 건립되어 현재 오처(五處)에서 향사하고 있다.
배위는 청주송씨(淸州宋氏)로 현감 구(縣監 俱)의 따님이다.
구보(舊譜)에는 배위(配位)의 기록이 없는데 지난 丙寅(1926)에 발간된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에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된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기록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또 이번에 『족성휘보(族姓彙報)』를 상고한바, 공의 배위의 주(註)에 청주송현감구여(淸州宋縣監俱女)란 기록이 있어 사실이 확인되었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國朝名臣錄, 號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