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 (柳陞)

류승(柳陞), 정신공(貞愼公), Ryu, Seung, 생몰년:1248-1298, 세:10
高麗忠烈王朝 名臣, 자 희원(希元)

공은 복야공 택(僕射公 澤)의 손이요, 문정공 경(文正公 璥)의 아들로 고종(高宗) 35년 戊申생이다.
15세 되던 원종(元宗) 3년 壬戌(1262)에 문음(門蔭)으로 산정도감판관(刪正都監判官)에 보직되고, 10년 己巳(1269)에 행수(行首 : 御駕侍從官)로 발탁되었다가 얼마 후 권간(權奸)들의 모함을 입고 부친 문정공과 같이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바로 풀려 나와 낭장(郎將), 군기장작감(軍器將作監), 공부)工部)와 호부(戶部)의 시랑(侍郞), 지합문사(知閤門事)등을 역임하고 원(元)나라에서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접반사(接伴使)로 갔다가 돌아와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었다.
15년 甲戌(1274)에 내직으로 들어와 전중윤판장작감(殿中尹判將作監)에 승진,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를 겸하였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통례문에 재직, 다른 관직에 옮기지 않았으나 이는 공께서 예문(禮文)에 밝았던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에 예문이 산실(散失)되었었는데, 공께서 신의(新儀)라는 책을 찬술(撰述)하여 내 놓으니 모두 그 자상함에 감복하고 쫓아 행하였다.
충렬왕(忠烈王) 13년 丁亥(1287)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재수되어 왕명(王命)의 출납에 근실하므로 왕의 칭찬은 물론 신임이 두터웠다. 17년 辛卯(1291) 9월, 밀직사사(密直司事)로 강화도(江華島)에 머무르면서 난리를 겪었던 지역에 조세(租稅)를 감면해 주고 이어 판도판서동지사(版圖判書同知事), 세자원빈(世子元嬪), 감찰대부(監察大夫),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 등을 두루 역임했는데 재직 기간 추호도 범법(犯法)이 없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모두 그 치적(治積)을 칭송하고 왕으로부터 양대은인(兩臺銀印) 1개를 하사 받았다.
20년 甲午(1294) 7월에 동지밀직사사로 재직중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들어 갔다가 이듬해 정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제수되고, 이어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승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니 이상은 공의 재직 36년간의 이력이다.
공은 용모와 행동이 바르고 기질이 총명하여 일찍이 가정교육을 독실히 익힘에 부친 문정공께서 매우 사랑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관직에 있을 때는 질병이 아니면 반드시 자기의 거처를 아뢰고, 술은 입에 대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 더욱 치밀하고 자상하였으며 성색(聲 色)과 재리(財利)에는 담담하였다.
공은 무술(武術)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다. 어느 날 손님과 함께 앉아 놀면서 멀리 물동이를 이고 가는 부인을 발견하고 공께서 이르기를 『만약 사람을 맞추면 다칠 것이요, 동이를 맞추면 깨질 것이니 동이 속에 화실을 떨어뜨리면 될 것이다』하고 활을 쏘니 과연 동이 속에 화살이 떨어졌다. 공은 이토록 명궁(名弓)이었다.
24년 戊戌(1298) 여름에 나라에서 거행하는 장경회(藏經會)에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동년 5월 2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충렬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슬퍼하사 부의(賻儀)를 후히 내리고 조회(朝會)를 파함과 동시에 정신공(貞慎公)의 시호를 내리었다. 동년 7월 18일 백관(百官)이 회장힌 가운데 우봉 서산(牛峰 西山), 지금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長湍郡 小南面 有德里) 와곡(臥谷)에 장례를 모시었다. 당시 지석을 묻었는데, 묘지명은 보문각학사 황모(寶文閣學士 黃某)가 짓고, 영동정 이모(領同正 李某)가 글씨를 썼다.
공의 저술인 신의(新儀)는 당시 유림(儒林)의 보감이 되었으며, 후에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의 은전(恩典)이 내렸다.
배위 남양홍씨(南陽洪氏)는 병부상서 진(兵部尙書 縉)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두고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고, 후배 안씨(安氏)는 좌우위보승별장 일규(左右衛保勝別將 日珪)의 따님으로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장남 인수(仁修)는 판도좌랑 중문지후사(版圖佐郞 中門祗候使)요, 2남 인전(仁全)은 동대비원록사(東代悲院錄事)인데 일찍 죽고, 3남 돈(墩 : 初名 仁和)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시호 장경공(章敬公)이요, 4남 인기(仁琦)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시호 온정공(溫靖公)이며, 사위는 좌사의대부 문정공 안동 권부(左司議大夫 文正公 安東 權溥), 국학제주 광산 김도(國學祭酒 光山 金滔)이며, 한분은 전하지 않는다.
공의 묘소는 실전되었었는데 丙子(1936) 7월에 후손 세영(世永)이 족인 화균(華均)의 전언을 듣고 장단을 찾아가서 수소문끝에 지석을 발견하고 동년 11월 15일에 제족으로 더불어 묘소를 봉축하였다.

※ 高麗史, 輿地勝覽, 墓誌.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