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춘 (柳承春)

류승춘(柳承春), 교관공(敎官公), Ryu, Seung-Choon, 생몰년:1567-1603, 세:21
宣祖朝 孝子 左相公派, 자 순원(順元). 부부쌍려특전.

증영의정 사공(贈領議政 思恭)의 장자인 울산부사 위(蔚山府使 渭)의 현손이요 장사랑 전(將仕郎 筌)의 계자(系子)이다. 생부(生父)는 정재 봉(定齋 菶)이다.
명종(明宗) 22년 丁卯에 부여(扶餘)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였다. 일찌기 일재 이 항(一齋 李 恒)의 문하에 수업, 학문에 전념하고, 한편 처 김씨로 더불어 어버이를 공경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뜻을 즐겁게 해 드림에 극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피란 하였는데 비록 난리 속인데도 음식 공봉을 빠짐없이 하고, 거처를 보살핌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육칠년을 지내도록 온 집안이 온전함을 얻었다, 또 끝에 누이를 출가시키고자 혼수(婚需)를 장만하는데 김씨 역시 자기 혼례시의 의복과 물품등을 내어 보태주니 부모들이 심히 기뻐함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이르기를 "효성에 감동한 소치라"고 하였다.
친환(親患)이 위독하심에 공이 하늘에 분향(焚脊)하고, 자신을 대신해 주도록 빌더니 드디어 모친(母親)께서 돌아가시자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하여 겨우 졸곡(卒哭)을 마친 후 공마저 여막(廬幕)에서 돌아가시니 때는 선조(宣祖) 36년 癸卯 9월 28일로 나이 37세였다. 임종에 부인 김씨에게 이르기를 "늙으신 아버님을 잘 모시라."하고 거연히 세상을 버리니 공의 부친께서 그 명정(銘旅)에 효우인(孝友人)이라 쓰시었다.
김씨께서 부군(夫君)이 돌아가신 후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시부(媤父)를 섬김에 부군 생전과 같이 하였으며, 이에 앞서 계숙(季叔)이 태어난 후 바로 시모(媤母)께서 병을 앓아 누우심에 부인이 받아 젖을 먹여 기르되 자기 소생처럼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로도 공의 유언(遺言)을 저버리지 않고 더욱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한편, 효경(孝經) 및 고인(古人)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입으로 가르쳐 마침내 성취시키니 시부께서 자부 김씨의 지성에 감격하여 마지 않고. 돌아가심에 이르러 유언하시기를 "나의 자부(子婦)가 죽으면 명정(銘旅)에 효부(孝婦)라 써서 그 아름다욱 행실을 드러나도록 하라"하시었다.
공께서 부여(扶餘)에 살다가 익산(益山)으로 이거하였는데 역시 이 고을에서도 모두들 『孝子. 孝婦』라 일컬었다.
배위 김씨(金氏)는 즉 경주인(慶州人)으로 열(悅)의 따님이다. 무후하여 공의 생정계제(生庭季弟). 수춘(秀春)의 2자 만세(曼世)를 맞아 계자(系子)를 삼았는데 만세(曼世)역시 효우(孝友)의 가법(家法)을 이어 고상한 행의가 있었다.
묘소는 부여군 석성면 염창리 선영(扶餘那 石城面 鹽倉里 先塋)에 방분(雙憤)으로 모셔 있다.
공 내외의 지극한 효행이 부여, 익산 읍지 및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 소저 삼강속편(三綱 續篇)에 실리고 공의 묘지(墓誌)는 아우 수춘(秀春)이 지었다.
영조(英祖) 18년 壬戌(1742)에 참찬 유최기(參贊兪㝡基)의 연주(筵奏)로 동시에 부부 정려(旌閭)의 특전을 무릅써 염창리(鹽倉里)에 세워지고 고종(高宗) 7년 庚午(1870)에 동몽교관(童蒙敦官)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가 공의 묘갈명을 지었으며, 후손은 대체로 지금 부여읍 염창리(扶餘邑 鹽倉里)에 세거하고 있다.
※ 墓碣銘.

[입력: ryuj 09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