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습(柳隰), 정암공(靖巖公), Ryu, Seup, 생몰년:1504-1570, 세:21
宣祖朝 行誼, 中門祇候使公派, 자 원숙(原叔). 호 정암(靖庵).
감찰 사식(監察 士植)의 6대손이요 참봉 수강(參奉 壽江)의 아들로 연산군(燕山君) 10년 甲子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질이 있더니 약관(弱冠)에 이르러 처부(妻父) 우암 이세헌(牛巖 李世獻)에게 수학하여 학문의 대방(大方)을 들었다. 중용(中庸)에 힘써 말하기를 『무궁한 이치를 알고자 할진대 먼저 작은 것부터 분석하라, 높은 하늘은 조화를 포함하고 큰 바다는 파도를 함축하도다.』 하고, 또한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어 혹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고금의 문헌을 참작하여 정문(情文)을 극진히 행하도록 타일렀다.
고인(古人)의 격언(格言)과 아름다운 사행(事行)을 친히 써서 자리곁에 걸어 놓고 항상 자신을 경계하였으며 거처(居處)에는 다른 물품은 별로 없이 다만 중용(中庸)한권만 있을 뿐이었고 종일토록 엄연히 꿇어 않아 의용(儀容)을 단정히 취하였다.
선조(宣祖) 초기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후생들을 가르침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원근의 선비들이 많이 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일찌기 오우칠외지계(五憂七畏之戒)로 자손을 경계하고 집이 가난하여 비록 풍우를 가리지 못하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을 수령이 이를 민망히 여기고 유산(油傘)과 화장(畵帳)을 보내자 공은 "이런 귀한물건이 어찌 가난한 선비의 집에 합당하겠는가"하고 받지 않았다. 특히 참봉 홍우식(參奉 洪禹軾)으로 더불어 친히 지내었고, 유고(遺稿)가 있다.
선조(宣祖) 3년 庚午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묘소를 실전하여 군위군성동면오산촌 후록(軍威郡城東面烏山科 後麓)에 설단 입비(設壇 立碑)하였는데 참판 류치명(參判 柳致明)이 비문을 지었다.
배위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우암(牛巖 世憲)의 따님으로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원종(元宗)이요, 사위는 진사 함양박장춘(進士 咸陽朴長春)이다.
단소(壇所)아래 재실 모원재(慕遠齋)가 있는데 철종(哲宗) 8년 丁巳(1857)에 창건하고 고종(高宗)42년 乙巳(1905)에 증건하였다.
후손은 군위군 호령면 병호동(軍威郡 孝令面 屛湖洞)과 오천동(梧川洞)에 집단 세거하고 있다.
※ 行狀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