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발(柳時發), ,Ryu, Si-Bal, 생몰년:1595-?, 세:21
仁祖朝 蔭仕, 左相公派, 자 양숙(養叔). 호 정헌(禎軒)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6대손이요, 월파 팽로(月坡 彭老)의 손이요, 옥봉 당(玉峰 ?)의 장자로 선조조(宣祖朝)에 옥과(玉果)에서 태어났는데 장성한후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에 수업하였다.
음사(蔭仕)로 도사(都事). 사평(司評)을 거쳐 양덕현감(陽德縣監)으로 재직중 인조(仁祖) 2년 甲子(1624) 이 괄(李 适)의 반란(叛亂)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집의(執義)에 승진되었다. 14년 丙子(1636) 호란(胡亂)에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갔다가 성(城)이 청병(淸兵)에게 함락되자 백악산중(白岳山中)으로 들어가 의병 백여인을 모아 놓고 옥과현감 이흥발(玉果縣監 李興浡)에게 서신을 부쳐 함께 적군을 치자고 약속하고 바야흐로 함께 모의(謀議)하던 즈음 화전(和戰)의 소식을 들고, 공이 여러 의사들과 함께 통곡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 사는 집에 『禎軒』이라 현관을 견고 『이는 숭정(崇禎)의 뜻을 취함이라』하였다.
배위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도길(導吉)의 따님으로 무육하여 공의 아우 시화(時和)의 장자 사룡(思龍)을 맞아 계자(系子)하였다.
묘소는 옥과 합강촌 정문등 간좌(玉果 合江村 旅門嶝 艮坐)에 합폄으로 모셔있다.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이 묘갈명을 지었는데 명(銘)에 이르기를『彰尊周義用夏言, 大明日月獨照此軒』이라 하였다.
후에 정려(旅閭)의 특명(持命)이 내리고, 아울러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 湖南三綢錄 月坡集附錄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