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번(柳時藩), 사월공(沙月公), Ryu, Si-Beon, 생몰년:1569-1640, 세:25.
仁祖朝 學者, 崑山君派, 자 위중(衛仲), 호 사월당(沙月堂).
연정 요신(蓮亭 堯臣)의 아들로서 선조(宣祖) 2년 己巳 4월 4일에 대구 해안현 삼태동(大邱 解顔縣 三台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에 수(數)와 방위(方位)를 알고, 9세에 괴헌 곽재겸(槐軒 郭再謙)에게 수학, 응대(應對)와 진퇴(進退)의 절차를 가르치는대로 어긋남이 없었다. 괴헌(槐軒)이 기특히 여기고 연정공(蓮亭公)더러 말하기를 『이 아이의 영특한 재주는 반드시 대성하리라』하였다.
19년 丙戌(1586)에 삼종숙 구정 사온(龜亭 思溫)과 함께 락재 서사원(樂齋 徐思遠)의 문하에 수학하다가 동년 12월 부친을 따라 동촌 신기(東村 新基)로 이거하였다.
이로부터 구도(求道)에 뜻을 두고, 정한강 구(鄭寒岡 逑)의 문하에 나아가 이석담윤우(李石潭潤雨), 채투암 몽연(蔡投巖夢硯)으로 더불어 경의(經義)를 강론하여 듣지 못한 바를 듣고, 이어 손모당처눌(孫慕堂處訥)을 종유하여 유도(儒道)의 바른 규범을 들었다.
24년 辛卯(1591)에 락재(樂齋)를 모시고 장여헌현광(張旅軒顯光)을 찾아 선사(仙査)에 가서 강학하였는데 여헌께서 공의 강론을 듣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모친을 모시고 팔공산(八公山)으로 피란하여 어려운 속에서도 독서를 폐하지 않았다. 이때 부친께서 창의(倡義)에 나서 의병소(義兵所)에 계셨는데 공이 날마다 왕래하며 안후를 살폈다. 난리가 잠잠해지자 모친늘 모시고 신기(新基) 본가로 돌아와 여전히 학문에 주력하였다.
32년 己亥(1599)에 락재(樂齋) 선생을 이천(伊川)으로 찾아 뵙고 모당(慕堂)과 함께 제반 강회(講會)에 빠짐 없이 참석하여 학문의 확충에 전념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원년 己酉(1609)에 모상(母喪)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었고 상장(喪葬)의 절차를 한강(寒岡) 선생에게 물어 행하였다.
7년 乙卯(1615)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으나 제명(除名)됨을 보고, 이로부터 과거에 뜻을 끊고, 세사(世事)에 더욱 뜻이 없어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울적한 감회를 시로서 풀었다.
10년 戊午(1618) 12월 부친 상(父親 喪)을 당하여 거상(居喪)의 정차를 한결 전상(前喪)과 같이 행하고, 이듬해 3월 인동 유학산(仁同 遊鶴山)에 장례를 모시고 아울러 모친의 묘소를 옮겨 합부하였다. 그리고 직접 비문을 지어 부친의 유고(遺稿)를 수집하고, 용사일기(龍蛇日記)를 수초하였다.
6년 戊辰(1628) 4월,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연경서원(硏經書院)에 모여 주서(朱書) 및 퇴계집(退溪集)을 강론하고, 그후 매년 참강(參講)하였다.
사월호(沙月湖) 곁에 정사(精舍)를 지어 사월당(沙月堂)이라 현액(懸額)하고 자호하엿으니, 이는 백사장에 밝은 달의 뜻을 취함이었다. 이로부터 은거하여 후생들을 가르침에 더욱 근실하니 원근에서 사우(士友)들이 다 와서 질의(質疑)하였다.
족제 통제사 여강(統制使 汝橿)이 일찍이 공에게 수업하였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돌아오므로 공께서 기뻐하지 않고 말하기를 『선비가 마땅히 득실(得失)을 명(命)에 부칠 따름인데 어찌 영달(榮達)에 급급하는가?』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후 사문차사원(赦文差使員)이 되어 왔거늘, 공이 의관(衣冠)을 갖추고 섬돌 아래 내려와 읍하고 이르기를 『내가 그대의 직책을 위함이 아니라 왕명을 중히 여김이다』하니 그 처의(處義)의 정밀함이 이같이 엄정하였다.
18년 庚辰 5월 4일에 향년 72세로 졸하니 동년 11월 6일 대구 북촌 비현산 경좌(大邱 北村 棐峴山 庚坐)에 안장되었다. 당시 부사 이시담(府使 李時聃)이 특히 부의(賻儀)를 보내어 위문하고 이웃 고을 사우(士友)들이 많이 와서 호상(護喪)하였다.
배위 양성이씨(陽城李氏)는 장(檣)의 따님으로 3남을 두어 종언(宗彦), 종경(宗慶), 종화(宗和)이다.
영조(英祖) 31년 乙亥(1755)에 사림(士林)에서 공의 학행(學行)을 기리어 대구 청호서원(大邱 靑湖書院)에 배향하였다. 이듬해 방손 성중(傍孫 成中)이 공의 유고(遺稿)를 수집하고 행록을 지었다.
정조(正祖) 9년 乙巳(1785)에 공의 묘소에 묘비를 세웠는데 대사간 류강(大司諫 柳焵)이 묘갈명을 지었다.
순조(純祖) 28년 戊子(1828)에 강고 류심춘(江皐 柳尋春)이 행장을 짓고 유고(遺稿)를 교정하였다.
헌종(憲宗) 12년 丙午(1846)에 9대손 상두(相斗)가 공의 유고 중에 빠진 부분을 각자의 문헌(文獻)에서 발췌하고, 연보(年譜) 및 부록(附錄)을 붙여 사월당집(沙月堂集)을 간행하였다. 공의 후손은 대구 경산능 중심으로 영천, 경주, 밀양, 구례 등지에 세거하고 잇다.
※墓碣銘, 沙月堂集.
[입력: ryuj 0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