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소(柳沼), 판서공(判書公), Ryu, So, 생몰년:?-?, 세:13.
太祖朝 蔭仕, 文平君派, 자 영재(靈哉).
공은 예부상서 언침(禮部尙書 彦沈)의〔柱1-문화류씨보감 37쪽 류희(柳羲) 편에서는 彦沉으로 표기되어 있음〕의 5대손이요, 검교대호군 개(檢校大護軍 開)의 장자이다.
고려 말엽에 전서(典書)를 지내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송악산(松嶽山)으로 자취를 감추어 절의를 지키다가, 얼마후 상락백 김사형(上洛伯 金士衡)의 권유로 출사하여 목사(牧使)를 지내었다.
만년에 청주 수락동(淸州 水落洞)으로 은거(隱居)하여 분송정(紛松亭), 영월정(暎月亭(, 관어대(觀漁臺) 등 정자를 지어 친한 벗으로 더불어 한가히 여생을 즐기었다.
배위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판종부시사 사겸(判宗簿寺事 士謙)의 따님으로 7남 1녀를 두었다.
묘소는 지금 청원군 옥산면 수락동(淸原郡 玉山面 水落洞) 망덕산 건좌(望德山 乾坐)에 상하분으로 모셔있다.
아들 지인(之仁)은 금산군수(金山郡守)요, 지의(之義)는 판관(判官)이요, 지례(之禮)는 황주목사(黃州牧使)요, 지지(之智)는 목사(牧使)요, 지신(之信)은 사정(司正)이요, 지강(之綱)과 지상(之常)은 현감(縣監)이니 모두 음사(蔭仕)이다. 사위 경주이계선(慶州李繼善)은 세종(世宗) 壬子에 문과에 급제, 봉상시윤(奉常寺尹)을 지내었다.
壬子(1912)에 후손들이 괴산군 서면 창동(槐山郡 西面 倉洞)에 공의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찬의(贊儀)를 지낸 풍산홍승목(豐山洪承穆)이 지었다.
후손은 대체로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槐山郡 沙梨面 中興里), 청원군 오창면 양청리(淸原郡 梧倉面 陽靑里), 청주시 신봉동, 복태동(淸州市 新鳳洞, 福台洞), 보은군 산외면 산대리(報恩郡 山外面 山垈里)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丁巳譜, 慶州李氏世譜.
[입력: ryuj 09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