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송제(柳松齊), 후조헌공(後凋軒公), Ryu, Song-Je, 생몰년:1622-1683, 세:23
肅宗朝 文臣. 夏亭公派, 자 창로(蒼老). 호 후조헌(後滴奸)
학암 몽정 (鶴巖 夢鼎)의 현손이요. 락봉 충건(樂峰 忠健)의 손이요. 증광흥창수 시량(贈凌興倉守 時亮)의 장자로 광해군(光海潛) 14년 壬戌 2월 8일에 충주 노은(忠州 老隱)에 서 태어나셨다.
부조(父祖)의 행실을 본받아 모든 소행이 고인에 부끄러움이 없더니 일찌기 그부친의 종창(瘇瘡)을 입으로 빨아 드디어 자기의 입술에 종기가 났었으나 더욱 그치지 않았으며, 그 아우 계제 (桂齋) , 현감 회제 (縣監檜齋)로 더불어 한 집에 살면서 사사로히 살림을 하지 않았다
현종(顯宗) 원년 庚子(166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으로 재임중 관찰사 민공유중(觀察使閔公維重)이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류모(빼某)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현령으로 있는데 치적이 출룹하니 승진시켜 주실 것을 청합니다.』하니 주상(主上)째서 특명으로 장계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시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삼세정려핀(三世旌閭傳)을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십실지읍(十室之邑)에 충신지인(忠信之人)이 하나만 있어도 그 고을에 들어서는 자 반드시 그 본을 받는 법인데 하물며 류주부(柳主簿)는 삼세를 효행으로 들렸으니 어제 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으로 천전지산(千錢之産)과 십금지자(十金之資)가 있어 능히 일. 이세는 미칠지로대 하물며 세상에 드문 지행(至行)인데야 비록 그 집안에 전통이 있다 할지언정 이 또한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덕화가 아니겠는가?』하였다.
현종(顯宗) 13년 壬子(1672) 6월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이듬해 7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숙종(肅宗) 甲寅(1674) 10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라 얼마후 파직되었다.
6년 庚申 (1680) 8월에 복직되어 이로부터 지평 정언을 거쳐 9년 癸亥(1693) 4월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가 동년 11월 13일에 졸하니 향년 62세로 충주 노은 고곡 신좌(忠州 老隱 羔谷 辛坐)에 안장되었다.
11년 乙丑(1685) 5월에 외재 이단하(畏齋 李端夏)가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류충건 (柳忠健)의 조 , 자 , 손 (祖 , 子 , 孫) 3세에 모두 효행이 훌륭하여 양세(兩世)에는 이미 증직(贈職)이 내렸으나 손자 송제(松齋)에게는 다만 생전에 우서(右敍)의 특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또한 증직을 내려야 마땅하옵니다.』하였다. 주상께서 윤허하시고 승정원도승지 (承政院都承旨)의 증직과 아울러 정려(旌閭)의 특명을 내리셨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홍구(鴻衢)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어 아들 장룡(長龍)은 양구현감(楊口縣監)이요, 장린(長麟)은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음사로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사위는 군수 한기유(郡守 韓起愈)와 현감 이건(縣監 李虔)이다. 또한 서 자에 장민(長民)이 있었다.
※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