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 (柳洙), 문성군(文城君), Ryu, Soo, 생몰년: 1415-1481, 세:15
世祖朝 功臣. 左相公派, 자 노택 (魯澤).
도총제 은지(都摠制 殷之)의 3남으로 태종(太宗) 15년 乙未 7월 22일 丁巳일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음보(蔭補)로 내금위(內禁衛)에 배속 되었다가 세종(世宗) 17년 乙卯(1435)에 세자익위사좌시직(世子翊衛司左侍直)에 제수되고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호군(護軍)에 승진하였다.
단종(端宗) 원년 癸酉(1453)에 형제로 더불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됨과 아울러 문성군(文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상호군(上護軍)에 승진하고, 세조(世祖)가 등극(登極)하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전직되었더니 2년 丙子(1456)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제수되어 부임에 앞서 구마 1필(廐馬 一匹)과 안의 일습(鞍衣 一?)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 재직 중,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옮기었다. 5년 己卯(1459)에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전직되었더니 3월에 전라병사(全羅兵使)로 나갔다.
7년 辛巳(1461)에 오위장(五衛將)으로 도총부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하고 이듬해 함길도부순찰사(咸吉道部巡察使)로 나갔다.
10년 甲申(1464)에 모친 왕씨(王氏)의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친 후, 13년 丁亥(1467)에 다시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 동년 5월 적신 이시애(賊匪 李施愛)가 북방(北方)에서 반란을 이르켜 그 기세가 자못 강성하자 세조(世祖)께서 특명으로 공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하였다. 공께서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녹양평(緣楊坪)에 진을 쳤는데 그 부오(部伍)가 정숙하여 사기(士氣)가 크게 떨쳤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바로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賃)에 승진되었다.
예종(睿宗) 원년 己丑(1469)에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그해 겨울 다시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
성종(成宗) 2년 辛卯(1471)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겨울에 동영장(東營將)에 제수되었다.
12년 辛丑 12월 1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였다. 성종(成宗)께서 애도(哀悼)하시고 조회(朝會)를 거두는 한편 부의(賻儀)를 후히 내리시고 안양공(安襄公)의 시호를 내렸다.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특히 무술(武術)이 뛰어나 왕의 총애(寵愛)를 받았었다.
공께서 돌아가신 이듬해 任寅(1482) 3월 甲申일에 양주 고을 동쪽 장여리(猜餘里) 자좌(子坐)언덕에 예장 (禮葬)으로 모셨다.
배위 순창설씨(淳昌薛氏)는 옥천군 훈(玉川君 纁)의 따님으로 어진 덕이 있었으며 5남 2녀를 두었다.
공께서 돌아가신 7년후 성종(成宗) 18년 丁未(1487) 3월에 향년 73세로 돌아가시자, 공의 묘소 왼쪽에 쌍분(雙墳)으로 모셨다.
설씨(薛氏)의 장례를 마친 후 곧바로 당시 승정원도승지 임사홍(承政院都承旨 任士洪)에게 묘갈명을 받아 묘비(墓碑)를 세웠다.
장남 백손(伯孫)은 양산군수(梁山郡守)를 거쳐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2남 중손(仲孫)은 청주판관(淸州判官)을 지내고. 3남 계손(季孫)은 양천현령(陽川縣令)을 거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지내고, 4남 말손(未孫)은 진사에 급제한 후 음사로 현감(縣監),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5남 종손(終孫)은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사위는 시정 상주김수말(寺正 尙州金守末). 인의 현풍곽린(引儀 玄風郭璘)이다.
공의 부조묘(不祧廟)가 함안군 함안읍 괘안리(咸安郡 咸安邑 掛安里)에 있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 嘉靖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