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강 (柳守剛), 참판공(參判公), Ryu, Soo-Gang, 생몰년: ?-?,세:15
世宗朝 蔭仕. 貞肅公派,
형조참판 의(刑曹參判 顗)의 2자인데 음사로 세종(世宗) 16년 甲寅(1434) 8월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이듬해 3월 우부승지(右副承旨), 6월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올랐다.
22년 庚申(1440) 2월 하정사(賀正使)의 임무를 마치고 명(明)나라로부터 돌아와 7월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고 12월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
25년 癸亥(1443) 9월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제수되고 12월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전직하여 사은사(謝恩使)로 또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 황제(皇帝)의 칙서(勅書) 및 관복(冠服)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때 왕세자(王世子)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오리정(五里亭)까지 나가 영접하였으며 4월에는 의정부(議政府)에서 연회(宴會)를 베풀어 공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동년 윤7월 한성부윤(漢城街尹)에 제수되었더니 27년 乙丑(1445) 4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가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겸임하고, 7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전직되었다가 이듬해 6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나갔다.
문종(文宗) 원년 辛未(1451) 7월 다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옮겼는데 이등해 5월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당시 경창부윤(慶昌府尹)으로써 부고사(訃告使)의 임무를 띄고 명나라에 들어가 부음(訃音)을 고하고 시호(諡號)를 청하였다.
단종(端宗)즉위 9월, 환국하여 복명(復命)하니 왕께서 안장을 갖춘 말 한필을 하사 하시였다.
세조(世祖) 8년 壬午(1462) 10월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재직중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묘소는 지금 고양군 벽제면 선유리 선영하 자좌(高陽郡 碧蹄齋 仙遊皇 先塋下 子坐)에 모셔져 비갈(碑碣)이 있다.
배위 정부인 백천이씨(貞夫人 白川李氏)는 판관 백충(判官 伯忠)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심(瀋)은 감찰(監察)이요, 준(浚)은 장연현감(長淵縣監)이요, 자(滋)는 사정(司正)이요, 오(?)는 진사(進士)이며, 사위는 감정 이윤손(監正 李尹係) , 군수 정겸(郡守 鄭謙) , 주부 이유효(主簿 李惟孝)이다.
공의 3자 자(滋)의 아들 팽석(彭碩)이 성종(成宗) 己酉(148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금산군수(金山郡守)를 거쳐 필선(弼善) 전한(典翰)을 지냈으며 후손이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黃海適 平山郡 細谷面)일대에 집단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毒靖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