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수원(柳壽垣), 농암공(聾菴公), Ryu, Soo-Won, 생몰년:1694-1755, 세: 24
英祖朝 文臣, 夏亭公派, 자 남로(南老) . 호 롱암(聾庵)
대사간 상재(大司諫 尙載)의 손이요, 통덕랑 봉정(通德郎 鳳庭)의 아들로 숙종(肅宗) 20년 甲戌에 충주 (忠州)에서 태어났다.
41년 乙末(1715)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이어 44년 戊戌(171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경종(景宗) 2년 壬寅(1722) 12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발탁되어 이듬해 2월 영의정 조태구(領議政 趙泰耈)의 처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정의 기강(紀綱)을 쇄신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이로서 조태구가 파직되어 시골로 쫓겨남에 조정의 중신(重臣)들이 공의 경박함을 지탄하여 마침내 예안현감(禮安縣監)에 보직되었으나 부임전에 파직 당하고, 동년 7월에 사면되어 랑천현감(狼川縣監)에 제수되었다.
영조(英祖)의 등극과 동시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승진되었으나 노론(老論)의 저지로 곧바로 파직, 금고(禁錮)되었다. 이는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領首)인 만암 봉휘(晩庵 鳳輝)의 종질(從姪)이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오로지 학문을 탐구하는 한편 치민(治民)의 대도(大道)를 저술로써 정력을 기울었으니 이른바 오서(迂書) 5권이다.
13년 T巳(1737) 정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단양군수(丹暘郡守)로 나갔다. 동년 10월 비변사당상 이종성(備邊司堂上李宗城)이 주상(主上)께 아뢰기를 『단양군수 류수원은 비록 귀머거리이나 학문에 능하여 저서(著書) 1부가 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經綸)이 뛰어나 헛되이 늙히기가 애석하옵니다.』하고, 영의정 이광좌(領議政李光佐)가 아뢰기를 『신이 또한 그 저서를 보니 책이름은 오서라 하는데 의논이 매우 기특하옵니다.』하였다. 주상께서 들으시고, 승정원(承政院)에 이 책을 구하여 올리도록 명하시고, 아울러 공을 내직으로 불러 비변사문랑(備邊司文郞)에 임명하였다.
그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이듬해 12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되었다.
17년 辛酉(1741) 2월 우의정 조현명(右議政 趙顯命)이 공의 재주와 학문을 찬사하고 높이 임용할 것을 주상께 주청하였다. 이로서 공이 부름을 받고 입시(入侍)하여 드디어 소저(所著),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바치고 그 이해(利害)와 편부(便否)를 토론하였는데 당시 공께서 귀가 어두움으로 영조께서 친히 글씨를 써 보이며 대화하였으니 실로 이례적이었다.
그후 관계(官界)를 떠나 집에 있던중, 31년 乙亥(1755) 2월 나주(羅州)에서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나고 뒤이어 과장(科場)에 또 변서(變書)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에 연루(連累)되어 동년 5월 25일 戊戌일에 참형 (斬刑)을 당하니 당시 향년 62세였다.
이에 앞서 공의 공초(供招)에 의하면 공이 동료들과 행정(行政)에 대한 비판과 토론을 가졌던 사실에 불과했는데 무고(誣告)로 복주(伏誅)되었다. 그 이튿날 참형된 심 악(沈錐)의 공초에 의하면 『수원(壽垣)의 언론은 나라를 위한 충성이요. 대역(大逆)을 도모함은 아니었읍니다. 저 역시 수원과 함께 죽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하였다.
배위 나주박씨 (羅州朴氏 : 潘南朴氏)는 참판 희진(參判 熙晋)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두어 아들은 동휘 (東環)요, 사위는 파평윤상로(坡平尹尙魯) , 파평윤광하 (坡平尹光廈)이다.
공께서 돌아가신 후 처자(妻子)가 모두 노비(奴婢)로 몰수되고 후손이 끊기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류모(柳某)의 오서(迂書)는 견식(見識)과 언의(言義)가 일세에 뛰어난 명저 (名著)이다.』하였다. 그후 묻혀져 비록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에 이르러 학계(學界)에서 교육균등(敎育均等) 및 중상주의(重商主義) 학설과 실학(寶學)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특히 일본(日本)등 외국 학자들 간에 연구논문이 많다고 한다.
※ 朝鮮王朝資錄, 迂書 , 甲子譜, 號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