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순(柳洵), 문희공(文僖公) Ryu, Soon 생몰년:1441-1517, 세:17
中宗朝 相臣, 左相公派, 자 희명(希明), 호 노포당(老圃堂)
상의중추원사 원지(商讓中樞院事 原之)의 증손이요, 세마 사공(洗馬 思恭)의 2자로 세종(世宗) 23년 辛酉생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도량이 출중하여 책을 읽으면 그 뜻을 통달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서적(書籍)이 없으므로 매양 남의 책을 빌려다 보았는데 한 책을 빌리면 밤낮으로 읽어 반드시 정확히 해득한 연후에 돌려 보냈다.
성동(成童)이 되어 남학(南學)에서 공부하여 18세에 금릉부(金凌賦)를 지었는데 사의(辭意)가 매우 심장(深長)함으로 많은 선비들이 모두 놀라고 회자(膾炙)하며 큰 인물이 될것을 기대하였다.
세조(世祖) 5년 己卯(1459)에 나이 19세로써 생윈시(生員試)에 장원하고, 8년 壬午(146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宇)에 뽑히고, 얼마 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옮기었다가 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로 전직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를 겸하고, 이어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 지제교(知製敎)를 겸임 하였다.
12년 丙戌(1466)에 문과중시(文科重試)및 발영시(拔英試) , 양과(兩淋)에 급제,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예종(睿宗) 원년 己丑(1469)에 모친상을 당하여 복(服)을 마친 후 성종조(成宗朝)에 다시 구직(舊職)에 복직되고, 이어 예문관(藝文館)으로 전직하여 응교(應敎)전한(典輸) , 직제학(直提學)등을 거쳐 9년 戊戌(1478)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승임 되었다.
왕께서 공을 불러 미인도(美人圖)를 보이시며 시부(詩賦)를 지어 바치도록 하였는데, 공께서 즉시지어 그 말구(末句)에 이르기를 "군왕(君王)이 이로부터 성색(聲色)을 멀리하니, 그림을 보고 오히려 찡그리시리 ."하니 왕께서 칭찬하여 마지 않고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비단으로 장식, 족자를 만들었던바 지금까지도 장화고(藏晝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듬해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어 바로 우부승지에 전임되고,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었다.
14년 癸卯(1483)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만기 후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내었다.
18년 丁末(1487)에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재임중 천추사(千秋使)로 명을 받고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참판(兵曹參判) , 의금부사(義禁府事) ,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등을 두루 역임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일찌기 흉년을 만나 왕명(王命)을 받들고 호서진휼사(湖西賑恤使)로 나가 은택이 고루 미치니 백성들이 그에 힘 입은 바 컸었다.
24년 癸丑(1493)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오르고 26년 乙卯(1495)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옮겼다. 연산군(燕山君) 4년 戊牛(1498)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다가 사사(史事)에 연좌(連坐)되어 파직을 당하였다. 몇달 후 풀려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고, 이어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전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하였다.
8년 壬戌(1502)에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올라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승진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0년 甲子(1504)에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었다.
당시 흔정(昏政)을 당하여 정사(政事)가 매우 어지러움으로 뜻있는 신하들이 많은 간쟁(諫爭)을 하였는데 직언(直言)하는 자는 죽임은 물론 그 화(禍)가 문내(門內)에까지 미치었다. 공이 수상(首相)으로써 누차 충간(忠諫)하다가 마침내 사직(辭職)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항상 사직(社稷)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丙寅(1506) 9월 중종(中宗) 반정(反正)에 참여, 정국공신 이등(靖國功臣 二等)에 참록(參錄)됨과 아울러 문성부원군(文成府院君)에 봉해지고 전답(田畓)과 노복(奴僕)등을 하사 받았다. 이에 앞서 공께서 아뢰기를 『신(臣)은 반정시(反正時)에 수상(首相)으로 변고(變故)를 듣고 황급히 나가서야 알았는데 또한 훈적(勳籍)에 참여함은 부끄럽고 관직에 있기가 더욱 민망하니 사직을 청합니다. 』하니 듣는 이들이 옳다 하였다. 이렇듯 굳이 사양하여 마침내 영의정(領議政)을 제임 하였다.
4년 己巳(1509)에 연산 폐조(燕山 廢朝)의 중신(重臣) 이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바로 복직(復職)되어 이듬해 치사(致仕)하니 레장(凡杖)을 하사받고 기사(耆社)에 들었다.
9년 甲戌(1514)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을 제수하므로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치 않으셨다. 11년 丙子(1516)에 노령(老齡)으로 사직을 굳이 청하여 마침내 윤허(允許)를 얻고 이듬해 병환이 침중(沈重)하여 집에서 요양(療養)하고 있었는데 왕께서 내의(內醫)를 보내어 간호케하고 때로 어찬(御饌)을 하사하시며, 승지(承旨)를 보내어 병환의 차도(差度)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듬해 丁丑 5월 3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7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왕께서 몹시 슬퍼하여 부의(賻儀)를 특별히 내리시고 조문(吊問)과 치제(致祭)를 의식에 쫒아 행하도록 하시는 한편, 사옹원(司饔院)에 명하여 어찬(御饌)에 육선(肉膳)을 드리지 말도록 하시고 이르기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은 누대 조정의 노성대신(老成大臣)인데 이제 별세함을 들으니 애통하기 그지 없어 육선(肉膳)을 차마 들지 못하겠다"하시었다.
문희공(文僖公)의 시호가 내리고 지금 양주군 진접면 팔야리 자좌(楊州郡 標接面 八夜里 子坐)에 예장(禮葬)으로 모셨는데 모두 관비(官庇)로써 조금도 결함이 없었다.
공의 묘지명은 좌의정 고령신용개(左議政 高靈申用漑)가 진고, 묘표는 판중추부사 진주강흔(判中樞府事 晋州姜渾)이 지었다.
공께서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여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경사(經史)와 백가제서(百家諸書)를 통달함은 물론 자학(字學)에 더욱 정통하여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틀림이 없었으며, 의약(醫藥) , 지리(地理)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부(詩賦)에 또한 뛰어나 일찍이 왕명(王命)으로 서거정(徐居正) , 노사신(盧思愼)과함께 연주시격(聯珠氏洛)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가정에 있어 자질(子姪)들을 가르침에 극히 법도가 있었고,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하여 의복 약물에 이르기까지 있고 없는 것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시비(是非)를 가려 남의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성이 검소하여 관직이 정승에 이르렀지만 몸에 비단옷을 입지 않고 유연(遊宴)을 즐기지 않아 관직 생활 40여년에 오직 궤장(几杖)을 하사받던 자리에 한번 나갔었다.
배위 단양장씨(丹陽張氏)는 지통례문사 계증(知通禮門事 繼曾)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응룡(應龍)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문원군(文原君)에 봉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응대(應臺)는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지냈으며, 사위는 첨정 순흥안숙(僉正 順興安熟)과 벽진이장견(碧珍李長堅) 이다.
※朝鮮王朝實錄 , 輿地勝覽 , 墓碣銘 , 海東名臣錄 , 號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