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숭인(柳崇仁), 병사공(兵使公), Ryu, Soong-In, 생몰년:1565-1592, 세:20
宣祖朝 武將, 左相公派,
안양공 수(安襄公 洙)의 3자 서흥부사 계손(瑞興府使 季孫)의 현손이요, 첨지 장(僉知 璋)의 증손이요, 원희(元禧)의 손이요, 빈(濱)의 아들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호남에서 창의(倡義)하여 금산(錦山)에서 순절(殉節)한 월파 류팽노(月坡 柳彭老)의 재종질(再從姪)이 된다.
명종(明宗) 20년 乙丑생으로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 현감(縣監), 사복시주부(司僕侍主簿)를 거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재직중 왜란(倭亂)을 맞이했다
선조(宣祖) 25년 壬辰(1592) 4월 왜적(倭賊)이 대거 침이바여 우리 강토를 유린하니 역시 이곳 함안(咸安)백성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성(城)이 거의 비기에 이르렀다.
공께서 비록 적은 군사였지만 지구전(持久戰)을 벌여 무려 한달 동안을 적병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더니 동년 6월 14일 드디어 방어망이 뚤려 적병이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공은 흩어진 구사 100여명을 불러 모아 연일 그들과 접전(接戰)끝에 왜적들을 퇴각시켰다.
7월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계진(啓陳)하기를 <함안군수 류숭인(咸安郡守 柳崇仁)이 전후로 죽인 적병의 수가 47인에 이르렀으니 그 공이 가히 가상하옵니다. 특별히 관작을 올려 충절(忠節)을 장려해야 할것입니다.>하니 선조께서 윤허(允許)하시어 9월에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후임으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에 승진되었다.
10월 초에 부산(釜山)등지에 둔치고 있던 왜적(倭賊)들이 군병(軍兵)을 모아 무려 이만여명을 이끌고 진주성(晉州城)을 포위 공략하였다. 이때 김성일(金誠一)은 호남의병장(湖南義兵將) 최경회(崔慶會) 임계영(任啓英)에게 원병(援兵)을 청하러 가고, 공게서 진주성(晉州城)아래 다달아 입성(入城)을 청하니 목사 김시민(牧使 金時敏)이 상사(上司)인 병사(兵使)가 입성(入城)을 하면 지위계통에 불편함을 염려한 나머지 성문을 굳게 닫고 거절하며 말하기를 <성문(城門)을 엄히 경계함은 혹 문을 열고 닫다가 급작한 변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바이니 주장(主將)께서 성 밖에 계시면서 응원함이 옳을까 하오.>하였다. 이에 별 수 없이 성 밖에 진을 치고 적병과 교전(交戰)하는데 이때 사천현감 정득열(泗川縣監 鄭得說)과 가배량권관 주대청(加背梁權管 朱大淸)등이 사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증원(增援)하여 왔으므로 병사(兵使)인 공께서 통합 천오백명의 아군(我軍)을 지휘하여 격전을 벌리었다. 적병은 다수의 병력(兵力)을 믿고 이중삼중으로 포위하여 철통같이 밀고 들어 오는데 아군 장병(將兵)들은 수효는 비록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결사(決死) 저항하여 수배경의 적군을 사살하고 적진(敵陣)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의 수효가 워낙 많아 드디어 진중(陣中)에서 삼장(三將)은 물론 병사들이 장열(壯熱)한 최후를 마치니 때는 壬辰 10월 5일로서 공의 나이 28세였다.
당시 진주성 대첩(晉州城 大捷)에 앞서 전초전(前哨戰)에서 적군의 예봉(銳鋒)을 꺾어 훌륭한 전공(戰攻)을 세우신 삼장(三將), 즉 류숭인(柳崇仁). 정득열(鄭得說). 주대청(朱大淸)의 충혼(忠魂)을 기리는 ‘三忠殉節碑’가 진주 전적지(晋州 戰跡地)에 세워지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왜정(倭政)시대에 왜인(倭人)들이 이 순절비를 두동강이를 내어 땅속에 묻었던 것을 근래에 발견되었다.
진주(晉州)를 위시하여 인근(隣近)의 뜻있는 인사(人士)들이 이 비(碑)를 보존하여 선인(先人)들의 충절(忠節)을 기리고자 진주성내(晉州城內)로 이건(移建), 복원(復元)하고 장차 사우 향사(祠宇 享祀)를 추진중이라 한다.
※ 朝鮮王朝實錄, 國朝故事, 鶴峯集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