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의남 (柳義男)

류의남(柳義男), 증승지공(贈承旨公), Ryu, Ui-Nam, 생몰년:1583-1642, 세:21.
仁祖朝 生員, 夏亭公派, 자 의보(宜甫).

부제학 희저(副提學 希渚)의 현손이요, 증사복시정 약(贈司僕寺正 瀹)의 2자로 선조(宣祖) 16년 癸未 2월 2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숙 판윤 신립(判尹 申砬)의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체격이 크고 음성이 컸었으며, 성품이 침착하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감사 이광(監司 李洸)의 손서(孫壻)가 되어 처족인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종유, 학문을 닦아 생원에 급제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 丁巳(1617) 10월 소수(疏水0首)로서 성균관 유생(成均館 儒生)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남명 조식(南溟 曺植)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두 차례나 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얼마 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하인준(河仁俊)이 흉측한 상소(上疏)를 올리면서 유생들의 이름을 제 마음대로 마구 써 넣었다. 공이 마침 신방연(新榜宴)에 참석하여 하인준(河仁俊)이 그 자리에 있음을 보고 종일 술을 마시지 않더니 그가 떠난 뒤에 “어미도 없는 자가 나갔으니 술을 마셔도 되겠다” 말하고 술을 마시었다. 그 일당인 박홍익(朴 弘益)이 그 말을 듣고 투소(投疏)하여 마침내 공을 역율(逆律)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공은 헤아리지 못할 재앙이 일어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진천(鎭川) 시골로 내려가 조석으로 명(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내 외종매 신성군부인(信城君夫人)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였다.
인조 반정(仁祖 反正)후로 수용(收用)의 특명(特命)이 있었으나 진천(鎭川)으로부터 고부 달천(古阜 達川)으로 이거하여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즐기면서 승지 임연(承旨 林堜), 부제학 신천익(副提學 慎天翊)과 더불어 매우 좋게 지내었다.
丁丑(1637)년 이후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사서(史書)인 춘추(春秋)를 항상 즐겨 보면서 “지금에 읽지 않으면 안될 것은 바로 이 책이다”라고 하였다.
20년 壬午 정월 15일에 향년 60세로 돌아가시니 묘소는 장성군 북상면 기동 을좌(長城郡 北上面 基洞 乙坐)에 모셔 있다.
택당 이공(澤堂 李公)이 만사(挽辭)를 지어 애도하기를 『관로(官路)에 나는 마침 더렵혀졌는데, 전원(田園)에서 그대 홀로 즐겼구나, 서로 따라 저승길에 가리니, 어디에서 현우(賢愚)를 비교할건가?』『簪紱吾終累田園子獨娛相隨泉下路何處較賢愚』
배위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안지(安止)의 따님이요, 감사 광(監司洸)의 손녀인데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무(楙)는 생원(生員)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요, 반(攀)은 진사(進士)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인데 재종숙 신중(再從叔 慎中)의 후로 출계하고, 빈(彬)은 진사)進士)로 용인현령(龍仁縣令)인데 계부 신남(季父 信男) 후로 출계하였다.
사위는 광산김여상(光山金汝鏛), 생원 광산김화일(生員 光山金華一), 부령김지강(扶寧金之剛)이다.
숙종(肅宗) 25년 乙卯(1699) 11월에 손자 경상좌병사 한명(慶尙左兵使 漢明)의 영전(榮轉)으로 인하여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贈職) 되었다.
공의 묘표는 성담 송환기(性 潭 宋煥箕)가 지었다.
장자 무(楙)는 자 백무(伯茂)인데 광해군(光海君) 5년 癸丑(1613) 생으로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고 행실이 독실하여 고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인조(仁祖) 20년 壬午(1642)에 부친 상을 당하여 여묘(廬墓)로서 3년을 마치였다. 현종(顯宗) 4년 癸卯(1663)에 생원에 급제하고 동년 8월에 전라도 유생(全羅道 儒生)으로 더불어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혼(牛溪 成渾), 양선생(兩先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다. 그 후 음사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고 숙종(肅宗) 13년 丁卯(1687)에 향년 75세로 돌아가시었다.

※朝鮮王朝實錄, 墓表, 瀛州三綱錄.

[입력: ryuj 09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