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위(柳湋), 계휴정공(繼休亭公), Ryu, Wi, 생몰년:1548-1595, 세:19
宣祖朝 名筆. 夏亭公派. 자 수원(秀源). 호 계휴정(繼休亭)
안숙공 계문(安肅公 季聞)의 5대손이요, 종묘서직장 충록(宗廟署直長 忠祿)의 장자로 명종(明宗) 3년戊申 7월 12일에 태어났다.
나이 11세 되던 13년 戊午(1558)에 부친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성인(成人)과 같았고, 상장(喪葬)의 기구를 손수 마련하여 집례(執禮)가 지극하였으며 아우 징(徵)과 우애가 심히 독실하여 일미(一味)만 얻어도 반드시 나눠 먹고, 서로 대함이 매우 지성스러웠다.
광주 세촌(廣州 細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독서(讀書)로 뜻을 기르고, 농상(農桑)에 부지런하더니, 선조(宣祖) 6년 癸酉(l573)에 생원에 급제하고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관직이 창평현령 (昌平縣令)에 이르렀다.
일찌기 시사(誇恩) , 필법(筆法) , 사기(射枝)에 모두 뛰어나 사람들이 삼절(三經)이라 일컬었다.
오리 이원익(梧里 字元翼) , 서경 류근(西坰 柳根)과 젊어서부터 우의(友誼)가 좋았었는데 그들이 탄복하여 이르기를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여 경세(經世)의 유용(有用)한 학자로 우리 류수원(柳秀源)같은 이가 없다.』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도원수 권율(都元帥 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다가 얼마 안되어 병으로 집에 돌아와 향년 48세로 돌아가시니 때는 선조(宣祖) 28년 乙未 2월 9일이었다.
배위 여흥민씨(驪興闊氏)는 경운(景雲)의 따님으로 2남을 두고 돌아가시니 지평현(砥平縣) 서쪽 10리거리 화곡 유좌(花谷 酉坐)의 부군(夫君)묘소에 합부하였다.
장자 성민(成民)은 자 양숙(養叔)이요, 호 내헌(耐軒)인데 선조(宣祖) 34년 辛丑(1601)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문음(門蔭)으로 형조정랑(刑曹표郎)을 지냈으며 후에 병조참판(兵曹參却)에 증직되었다.
2자 광민(匡民)은 자 정숙(正叔)인데 광해군(光海君) 10년 戊牛(1618)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정사(政事)가 날로 어지럽자 벼슬을 하지 않고 충청도 연산(忠淸道 連山)으로 남하하여 살다가 인조(仁祖) 7년 己巳(1629)에 51세를 일기로 세상을떠났다.
서자(庶子) 2인이 있으니 제민(濟民)과 정민(定民)이 모두 진사(進士)인데 무후(無后)하였다.
후손은 대체로 부천(富川) , 화성(華城) , 당진(唐凄) , 공주(公州) , 논산(論山) , 완주(完州) , 부안(扶安) , 정읍(井邑) , 김제(金堤) , 고창(高敞)등 서해안(西海岸)에서 세거하고 있다.
※ 東圍書晝考. 丁巳譜, 廣州邑誌.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