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원지 (柳原之), 중추공(中樞公), Ryu, Won-Ji, 생몰년: ?-1398, 세: 14,
太祖朝 蔭仕, 左相公派, 초명 원지(源之).
좌의정 만수(左議政 曼殊)의 장자이다.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재직중, 태조(太祖) 3년 甲戌(1394) 10월에 정당문학 민제(政堂文學 閔霽)와 함께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돌아와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승진하였다.
7년 戊寅(1398) 8월 26일 밤, 이른바 제 1차 왕자란(王子亂)에 소인들의 무고(誣告)로 부친 좌상공과 함께 피화(被禍)되었다.
세종(世宗) 5년 癸卯(1423)에 신원(伸寃)되어 관직이 회복되었고, 후에 증손 좌찬성 지(左贊成 輊)와 영의정 순(領議政 洵)의 귀히 됨으로 인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중직되었다.
배위 풍천임씨(豐川任氏)는 밀직 의(密直 毅)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어, 아들 함(浛)은 기주현감(基州縣監)이요, 종(淙)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급(汲)은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이며, 사위는 부사 순천이극문(府使 順天李克文)이다.
장자 함(浛)은 태조 7년 戊寅 8월, 왕자란에 조부와 부친을 동시에 여의고 조모 영숙택주 남양홍씨(寧淑宅主 南陽洪氏)를 따라 어렸 아우들과 함께 한양(漢陽)으로부터 진외가(陳外家)인 양주 경신곡(楊州 庚申谷)으로 피란, 그곳에서 성장하면서 늙으신 조모를 모시는 한편 아우들과 우애가 매우 독실하였다. 세종조에 부조(父祖)의 원사(寃死)가 신설(伸雪)된 후 음사(蔭仕)로 기주현감(基州縣監)을 지내었다. 성종조(成宗朝)에 손자 좌리공신 문양군 좌찬성 지(佐理功臣 文陽君 左贊成 輊)의 봉작(封爵)으로 인하여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묘소를 실전하여 양주군 은현면 도하리(楊州郡 隱峴面 道下里)후록에 소재한 장자 서산 자미(西山 自湄)의 묘소 위에 설단(設壇) 향사하고 있다.
2자 종(淙)은 11세 되던 해 가화(家禍)를 당하여 양주(楊州) 진외가댁에서 성장하였다. 음사로 양구현감 (楊口縣監) ․ 직산현감(稷山縣監) ․ 한성판관(漢城判官) ․ 영유현령(永柔縣令)을 역임한 후 포천 왕방산(抱川 王方山)밑에 터를 잡고 살았으니 지금 포천읍 자작리(抱川邑 自作里)이다. 손자 영의정 순(領議政 洵)의 봉작으로 인하여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포천군 신북면 계류리(抱川郡 新北面 溪流里) 방축동 술좌(戌坐)에 모셔있다.
3자 급(汲)은 어려서 가화(家禍)를 만나 형들과 양주(楊州) 진외가댁에서 성장하여 음사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내었다. 묘소를 실전하여 후손의 세거지인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抱川郡 新北面 機池里)후록에 설단 향사하고 있다.
공의 묘소를 실전하여 2자 찬성 종(贊成 淙)의 묘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설단(設壇) 향사하고 있다.
공의 후손은 대체로 포천(抱川)․ 울산(蔚山)․ 양산(梁山)․ 광산(光山)․ 여주(驪州)․ 이천(利川)․ 영천(永川)․ 양주(楊州)․ 부여(扶餘)․ 신천(信川)․ 진주(晋州)․ 철원(鐵順)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