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운(柳雲), 문경공(文敬公), Ryu, Woon, 생몰년:1485-1528, 세:18
中宗朝 節臣. 檢漢城公派, 자 종룡(從龍). 호 항재(恒齋). 성재(醒齋).
예조참판 양도공 영(禮曹參判 良度公 穎)의 현손이요 사지 공좌(司紙 公佐)의 아들로 성종(成宗) 16년 乙巳에 한양(漢陽)에서 태어났다.
연산군(燕山根) 7년 辛酉(1501)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10년 甲子(1504)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중종(中宗) 원년 丙寅(1506) 12월 이조좌랑(吏曹座郞)으로 재직중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恩典)을 입고, 이듬해 8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승진되었다가 9월에 정언(正言)으로 좌천(左遷)되고, 3년 戊辰(1508) 11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0월 첨정(僉正)으로 재직중 왕명(王命)을 받들고 홍천(洪川)에 가서 공채(公債)의 수렴(收斂)과 형벌(刑罰)의 남용(濫用)을 적발 조치 하였다.
5년 庚午(1510) 2월 다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발탁되었더니 4월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전임하고 이듬해 8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으며, 8년 癸酉(1513) 10월 선공감정(繕工監正)으로 전임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특배(特拜)되었다.
11년 丙子(1516)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이듬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전임되었다가 얼마 후 외직(外職)으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
공은 본래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검속(檢束)에 구애하지 않았는데 호서백(湖西伯)으로 부임하여 청풍 한벽루(淸風 寒碧樓)에 들러 시를 짓고, 단양군(丹陽郡)에 들러 시 일절(一絶)을 지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흉악한 돌을 다 주워내어 평평한 시내는 밝게 흐르누나 바람을 잡아 바다에 가두고 그 뒤에 내 배를 뛰우리라.』
『拾盡幽項石 平鋪淸淨流. 補風團海若 然後放吾舟』
이로부터 간당(奸黨)들이 그 시(詩)를 전송(傳誦)하여 공의 뜻을 꺽지 못할 것을 알았었다.
14년 己卯(1519) 10월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는데 11월에 간당(奸黨)의 모함으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정우당 김직(淨雨堂 金湜)등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참혹한 화(禍)를 입었으니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정상공광필(鄭相公光弼)의 천거로 동월 16일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이튿날 공께서 사직을 청하고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등을 전하(殿下)께서 친히 발탁하사 신망(信望)하심에 그들이 다만 충심(忠心)으로 보국(報國)할 줄만 알고 물정(物情)에 어긋남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 지경에 이름은 전하께서 사류(士類)를 대접함이 그릇친 것입니다. 이제라도 재제(裁制)하여 바르게 하시옵소서. 이같은 사람들을 어찌 쉽게 얻겠읍니까? 그렇지 않고 하루 아침에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신다면 누가 전하의 마음을 믿겠읍니까? 참으로 후세에 끼치는 법도(法度)와 국맥(國脈)을 연장하는 도리가 아님니다. 신(臣)이 이로서 대사헌(大司憲)의 직책에 나간다면 사기(士氣)마저 떨어질 것이오니 참으로 참당하고 한심 스럽습니다. 때문에 감히 사양하나이다. 』 하였다.
그리고 의금부(義禁府)에 다달아 문틈으로 조광조(趙光祖)의 자(宇)를 불러 손을 잡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주상(主上)을 지성으로 섬겼는데 어찌 이런 망극한 처지에 이르렀는가?』하고 집으로 돌아와 처(妻)와 더불어 영결(永訣)을 기약하고 입궐(入關)하여 주상께 다시 극론(極論)의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말구(末句)에 이르기를 『신(臣)의 머리를 베어 간인(奸人)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소서』하였다.
이렇듯 사류(士類)들을 구하려다가 마침내 간당(奸黨)의 탄핵을 받아 안당(安?). 김안국(金安國)등과 함께 파직을 당하고 양성(陽城)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워낙 청렴(淸廉)하여 집에 저장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다만 시주(詩酒)를 즐기고 의분(義憤)을 못이겨 술로 마음을 달래다가 창자가 썩어 죽으니 때는 중종(中宗) 23년 戊子 12월 30일로 공의 나이44세였다.
사관전(史官傅)에 이르기를 "류 운(柳 雲)은 천성이 영특하고 호걸스러워 시(詩)에 능하고 가사(歌辭)도 좋아하였으며 나이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35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었다. 己卯에 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조광조(趙光祖)등을 구하고자 무척 애를 썼다. 그 본심(本心)은 바른 사람이었는데 권세를 잡은 간신(奸臣)들에게 쫓겨나 戊子에 집에서 죽었다. 공은 한갖 문학(文學)으로 명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관리로써 자질이 뛰어나 본래 재상(宰相)감으로 기대하였는데 마침내 크게 쓰이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기었다. 그러나 그 풍류(風流)와 여운(餘韻)은 지금까지 오히려 남아 있으니 이를테면 대사헌(大司憲)에 발탁되어 상소(上疏)로써 신(臣)의 머리를 베어 간사한 무리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소서, 한 것이다.
이로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성(陽城)으로 쫓겨나 살았는데 집에 저장한 물건이 없었으며 오직 시와 술을 즐기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배위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만호 수손(萬戶 寺孫)의 따님이요 군수 고(郡守 槹)의 손녀인데 자녀를 두지 못하여 후에 공의 삼종 승석(三從 承錫)의 계자 경(季子 涇)으로 입계(入系)하였다.
후손이 미약하여 묘소마저 실전되었다.
영조(英祖) 22년 丙寅(1746) 7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의 증직과 아울러 문경공(文敬公)의 시호가 내렸다.
공의 저서(著書)로는 진수해범(進修楷範)이 세상에 간행되었으며, 공의 사적은 기묘당적(己卯黨籍). 기묘록보선(己卯錄補選). 해동잡록(海東雜錄). 사재집(思齋集). 지퇴당집(知退堂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운옥(大東韻玉).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 등에 기록되어 있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號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