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여강(柳汝橿), 통상공(統相公), Ryu, Yeo-Gang, 생몰년:1614-1673, 세:25
顯宗朝 武將. 嵐山君派, 자 공직(公直). 호 학산(鶴山).
구정 사온(龜亭 恩溫)의 4자로 광해군(光海君) 6년 甲寅 4월26일 해안현(解顔縣), 지금 대구 동출(大邱 東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더니 장성함에 형들을 따라 족형 사월당 시번(沙月堂 時禱)에게 수업, 경서(經書)는 물론 병서(兵書)와 수리(數理)에도 해박하지 않음이 없었다.
인조(仁祖) 14년 丙子(1636) 무과에 급제, 선전관 겸 비변량(宣博官 兼 備邊郎)으로 재직중, 청군(淸軍)이 우리 도성(部城)을 함락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域)으로 주상을 호종(扈從)하였다. 당시 난리를 만나 계사(啓事)할 일이 많았는데 공이 그 사이에 주선하고 응대(應對)함은 물론 상황에 따라 기록함이 민첩함으로 상관으로부터 촉망하는 바 되었으니, 때에 나이 24세였다.
17년 已卯(1639)에 부친 상을 당하고 복을 마친 후 다시 비변랑에 제수되었다가 21년 癸未(1643)에 강동현감(江東縣監)으로 나갔다.
봉림대군(鳳林大君) 이 심양(瀋暘)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 강동을 경유하였는데 공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특산이 순나물(蓴?)인데 반찬에 어찌 순나물이 없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이 나물은 가을이라야 있는데 지금 그 때가 아니라 소인이 감히 여쭙기 황송하나이다』 함으로 대군이 크게 기특히 여기었다.
24년 丙戌(1646)에 모친 상을 만나 복을 마치고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에 제수되었다.
효종(孝宗) 원년 庚寅(1650)에 자산군수(慈山郡守)로 나가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축조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가 장계(狀啓)를 올려 포상(褒賞)을 청하고, 원접사(遠接使)가 또한 주상께 주달하여 마침내 주상으로부터 큰 칭찬과 아울러 포상을 받았다.
임기를 마치고 훈련원첨정(訓鍊院 僉正)에 제수되었는데 자산(慈山)재임시 치적이 다시 거론되어 당상(堂上)에 특승(特陞), 6년 乙未(1655)에 중화부사(中和府使)를 거쳐 이듬해 영변부사(寧邊府使)로 전임하였다. 영변에 부임 즉시 철옹성(鐵饔城)을 축조, 한결 자모성과 같이 하니 특명으로 가선대부(讀善犬夫)에 가자(加資)됨과 아울러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제수되었다. 이렇듯 갑자기 승진됨은 또한 특이한 예로서 효종(孝宗)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8년 丁酉(1657)에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어 금위장(禁衛將) 훈련원도정(訓凉院都正)을 겸하고, 10년 己亥(1659)에 충청병사(忠淸兵使)로 나갔다.
현종(顯宗) 원년 庚子(1660)에 회령부사(會寧府使)로 나가 3년 壬寅(1662) 정월 실화(失火) 사건으로 파직되었더니 5年 甲辰(1664) 11월 전라병사(全羅兵使)에 제수되고, 어사(御史)의 포계(褒啓)로 7년 丙午(1666) 12월 숙마(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이어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어 금군별장(禁軍別將) . 포도대장(補盜大將)을 겸 하였더니 이듬해 12월 명화적(明火賊) 사건으로 파직되고 9년 戊申(1668 )황해병사(黃海兵使)로 나갔다. 11년 庚戌(1670) 11월1일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제수되어 통제영(統制營)에 부임하였는데 공이 변경(邊境)을 두루 역임하면서 토질(土疾)로 본래 고생하더니 이곳에 이르러 더욱 악화되어 드디어 눈마저 어둡게 되었다. 이듬해 7월 교체되어 서울로 돌아와 14년 癸丑 정월 23일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0이었다.
동년 3월27일 고향으로 반장하여 인동 유학산 건좌(仁同 遊鶴山 乾坐)에 모셨다.
배위 청도김씨(淸道金氏)는 사지(四知)의 따님으로 2녀를 두고, 흥덕장씨(興德張氏)는 진사 복환(復煥)의 따님으로 공과 결혼하여 1남을 낳고 10년만에 부군을 여의었다.
아들 성갑(星甲)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인 태징(台徵)의 따님과 결혼, 겨우 1남 후(?)를 낳고 일찍 돌아가셨으며, 사위는 병사 장우주(兵使 張宇柱) . 황호(黃扈)이다.
후실(後室) 둘이 있었는데 한분은 2남 3녀를 두어 아들은 첨사 안방(僉使 安邦)과 주방(柱邦)이요, 따님은 임세중(任世重) . 군수 이동상(李東相) . 배익경(裵益慶)에게 출가하였고, 한 분은 4녀를 두어 병사 이필(兵使 李泌) . 무과 이석행(武科 李碩行) . 신 적(申 湯) 수사 민섬(水使 問暹)에게 출가하였다.
공께서 다섯 고을 수령(守令)과 사도의 병사(兵使)를 지냈는데 이르는 곳마다 관리로서 직분을 다하여 공로가 드러났고 관직이 당상(堂上)에 이르렀으나 항상 부모에게 영양(榮養)을 다하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애통하게 여기었다. 동료 중에 봉친(奉親)하는 이를 보면 문득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써 효도를 다 해야 하는데 나만 흘로 행하지 못했으니 어찌 불효가 이토록 심한가?』 하고 항상 슬픔을 간직하고 유모(孺慕)의 지성을 다하였다. 형과 아우 4인이 일찍 죽고 중형(仲兄)한 분이 병이 있어 장기간 침약(針藥)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공께서 사방으로 관직 생활에 자주 가보지 못함을 애석히 여기고 좋은 약등을 구하여 보냄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외로운 조카들을 친 자식처럼 여기고 글 재주 있는 아이에게 문방(文房)의 물품을 구해 주고, 무예(武藝)가 있는 아이에게 무고(武庫)의 소용품을 대주는 등 각기 재주에 따라 성취시키었다. 이렇듯 공의 심사와 행실이 모두 효성과 우애에 비롯되어 가정에도 독실했음을 가히 알겠도다.
공께서 돌아가신 당년에 부인 장씨(張氏)께서 종손 형(從孫 泂)으로 하여금 행장을 짓게 하고 연일현감 손단(延日縣監 係湍)에 게 묘갈명(墓碣銘)을 받아 묘비를 세웠다. 그 후 마모되어 고종(高宗) 중엽에 개수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2년 후 숙종(肅宗) 원년 乙卯(1675) 정월 25일 주상께서 예조좌랑 윤 선(禮曹佐郎 尹選)을 보내어 사제문(賜祭文)을 내려 치제(致祭)하였다.
유품(遺品)으로 내사연기신편(內賜漑機新篇) 3권과, 교지(敎旨) . 유지(遺旨) . 사제문(賜祭文) 등 20여장이 구례군 산동면 함정리 객산(求禮郡 山東面 塔撻里 客山) 공의 사당(祠堂)에 보관되었었는데 고종(高宗) 27년 庚寅(1890)에 화재로 인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지금부터 50년 전에 사당 1간을 중건하여 매년 음1월1일 8월15일 절사(節祀)를 행하고 있다.
※ 朝鮮王朝實錄. 墓緖銘. 丁巳譜.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