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 (柳穎), 양도공(良度公), Ryu, Yeong, 생몰년: ?-1430, 세: 14,
世宗朝 蔭仕, 檢漢城公派
검한성사 원현(檢漢城事 元顯)의 2자로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에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조선 태종(太宗) 초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7년 丁亥(1407) 7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재임 중, 상소(上疏)로써 간당(奸黨)을 제거할 것을 청하고, 형조장랑(刑曹正郎)으로 전임되었다가, 9년 己亥(1409) 정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되었다.
13년 癸巳(1413) 12월, 당시 천재(天災)로 인하여 각도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였는데, 공은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써 충청도경차관에 임명되어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와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7년丁酉(1417) 8월 지형조사(知刑曺事)에 승진하였다.
세종(世宗) 즉위 후 부대언(副代言)에 제수되고, 이어 좌 , 우대언을 거쳐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 지예조사(知禮曹事)를 두루 지내었다.
공께서 일찌기 고금의 사적을 상고하고 내외 종지(內外 宗支)의 서차를 분별하여 족보(族譜)를 편찬, 5년 癸卯(1423) 8월에 완성을 보았으니, 이른바 영락보(永樂譜)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행된 족보이다.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 경창부윤(慶昌府尹) , 대사헌(大司憲) , 인순부윤(仁順府尹)등을 거쳐 8년 丙午(1426) 3월, 한성부윤(漢城府尹), 동년 9월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고 12년 庚戌(1430) 6월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재임 중 돌아가시었다.
세종께서 쌀과 팥을 각각 20석씩 하사하여 치전(致?)을 명하고 아울러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증직과 함께 양도공(良度公)으로 시호를 내렸다.
공의 소저(所著)인 모친생신연회서(母親生辰宴會序)와 순창제영시(淳昌題詠詩)등이 문헌에 전하고 있다.
배위 정부인 서원이씨(貞夫人 西原李氏)는 정당문학 지(政堂文學 至)의 따님으로 3남 6녀를 두었다.
아들 효련(孝聯)은 인수부판관(仁壽府判官) ,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인천군사(仁川郡事) 등을 지내고, 효반(孝班)은 소윤(少尹)을 지내고, 효강(孝綱)은 증판서(贈判書)이며, 사위는 군수 서원곽음(郡守 西原郭廕), 판관 윤자신(判官 尹自新), 군사 경주김남묘(郡事 慶州金南畝) , 교수 김전(敎授 金甸) , 직강 춘천박여(直講 春川朴旅) , 목사 한산이원증(牧使 韓山李元增)이다.
공의 묘소가 양주 창화동(楊州 昌華洞)으로 일러오나 실전되어 후손들의 지극한 한탄이러니, 甲申(1944) 봄에 후손 세영(世永)의 주창으로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蓮川郡 百鶴面 鶴谷里)에 있는 공의 3자 효강(孝綱)의 묘역에 설단하였는데 庚寅(1950) 사변으로 말미암아 파손된지라, 丙辰(1976) 7월에 후손 인종(寅鐘)의 발의로 구단(舊壇)에서 아래로 30보 위치에 다시 설단하여 향화(香火)를 계속 받들어 오다가 丙寅(1986) 8월에 후손들의 합의로 아산군 탕정면 동산리(牙山郡 湯井面 銅山里)에 소재한 공의 장자 효련(孝聯)의 묘소위에 제단(祭壇)을 설치, 합단(合壇)하여 매년 10월 1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공의 후손은 아산군 탕정면 동산리 ,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 양산군 물금면 교리 ,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 구미리 등지에 집단 세거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 輿地勝覽, 永樂譜序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