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柳渶), 염재공(濂齋公), Ryu, Yeong, 생몰년:1660-1722, 세:23
肅宗朝 學者. 左相公派, 자 여호(汝浴). 호 염재(濂齋).
동몽교관 승춘(童蒙敎官 承春)의 손이요, 취정 만세(翠庭 曼世)의 3자로 현종(顯宗)원년 庚子에 부여(扶餘)에서 태어났다.
공은 얼굴이 맑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풍채가 훌륭할 뿐 아니라 도량이 커서 곤궁한 일가를 보면 애석히 여기고 새 옷이라도 벗어주었다.
우암 송시열(尤暗 宋時烈)선생의 문하에 수업하였는데 선생께서 검속명성(樓束明誠) 4자를 써 주시며 권장하시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절(禮節)을 한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물아 행하였으며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성도(聖道)를 존숭하여 지론(持論)이 준엄 정직할 뿐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있었다.
숙종(肅宗) 13년 丁卯(168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사문(斯文)의 큰 논의가 있었는데 김 함(金 錎)으로 더불어 중론(衆論)을 배척 항의하니,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선생께서 칭찬하여 이르기를 『사문(斯文)을 구하고 보전하는데 이 사람보다 더 할 수 없다』하시었다.
숙종(肅宗) 15년 己巳(1689)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께서 폐위(廢位)되자 공이 성균관의 여러 유생(儒生)들과 함께 궐내(闊內)에 들어가 울부짖으며 부당함을 역설(力說)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마침내 부여(扶餘)로 내려왔다.
20년 甲戌(1694)에 환국(換局)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친척이 당시에 요직(姿職)에 있었지만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고 시골에서 지내며 스스로 만족하였다.
공이 향당(鄕黨)에서 온화하게 처신(處身)하고 자질들을 법도(法度)로 가르치며, 곤궁한 이를 도와주되 항상 미치지 못한 것같이 하였다. 그리고 지평 정택뢰(持平 鄭澤雷)와 의주목사 황일호(義州牧使 養一皓)를 부여 의열사(扶餘義烈祠)에 배향(配享)할 때 공께서 실로 주창(主倡)하여 성취 시켰다.
공께서 문사(文詞)가 뛰어나고 필법(筆法)이 능하여 종유(從遊)한 분들은 모두 일대의 명류(名流)로서 지호 이 선(芝湖 李 選) , 진산 윤이건(珍山 尹以健)과는 가장 막역(莫逆)하였다. 경종(景宗) 2년 壬賁 9월 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63세로 묘소는 부여 염창리 유좌(扶餘 鹽倉里 酉坐)에 모시었다.
공의 묘표는 도암 이 재(陶菴 李 諦)가, 행장은 석당 정구석(石塘 鄧龜錫)이, 묘지는 고산 임헌회(鼓山 任憲晦)가, 묘표추기는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가 각기 지었다.
배위 대구서써(大邱徐氏)는 동지 문진(同知文縉)의 따님으로 6남 1녀를 두고, 묘소는 합부하였다.
아들은 상훈(相勛) , 상화(相華) , 상하(相夏) , 상은(相殷) , 상로(相魯) , 상한(相漢)이요, 따님은 연일정 고(延日鄭 橰)에게 출가(出嫁)하였으며 서자에 상철(相喆)이 있었다.
장자 상훈(桐勖)은 정훈(庭訓)을 익히어 학업을 일찍 성취하고 제현(諸賢)의 문하에 종유하며 선세의 문자(文字)를 받아 석의(石儀)를 갖추고 선업을 계술(繼述)하였으며, 3자 상하(相夏)는 영조(英祖) 戊申에 이인좌(李麟佐) , 신천영(申天永)등이 반란을 일으켜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때 민임수(閔任沫)등으로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주 차령(公州 車嶺)에 이르러 관군(官軍)이 란적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왔으며, 5자 상로(相魯)는 호 계술당(繼述堂)인데 말을 배울때 이미 글을 읽을 줄 알더니 장성함에 경전(經博)에 전심하여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부(時賦)를 일러 말하기를 『기교(奇巧)함이 귀한 것이 아니고 뜻이 있으면 되는 것인데 문득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익하다』하였다.
한편 효우(孝友)에 독실하여 어버이 봉양에 정성지질(定省之節)을 다하고 거상(居喪)에 슬픔을 다하였고 형제간에 한 이불에 자고 한 책상에 공부하였으며 일체 세상에 뜻을 끊고 수신(修身)에 더욱 힘썼다.
인산 소휘면(仁山 蘇輝冕)이 행장을 지었다. 6자 상한(相漢)은 호 수묵재(守黙齋)인데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나 효우(孝友)가 지극하더니 장성함에 경사(經史)에 전심하여 자못 침식 (寢食)을 잊었다. 견식(見識)이 고명하고 천리(踐履)가 독실하여 평상시에 태만한 기색이 없었고 남과 접음(接應)함에 겸손한 뜻이 있었다. 현감 김건수(縣監 金建沫)가 묘지를 지었다.
공의 후손이 부여읍(扶餘邑) , 염창리(鹽倉里) , 능산리(陵山里) , 중정리(中井里)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 儒城文獻誌. 墓表. 典故大方書晝考
[입력: ryuj 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