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용(柳墉), 신옹공(愼翁公), Ryu, Yong, 생몰년:1470-1533, 세:17
中宗朝 武臣. 左相公派, 자 진국(鎭國). 호 신옹(愼翁).
문성군 수(文城君 洙)의 손이요 장흥부사 백손(長興府使 伯孫)의 2자로 성종(成宗) 원년 庚寅생인데 어려서부터 영특하므로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여 이르기를 "류씨에 대대로 인물이 있다"하였다.
성종(成宗) 22년 幸亥(1491) 봄에 친시무과(親試武科)에 급제하니 이때 공의 나이 22세였다. 그해 겨울 북방(北方)의 오랑캐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2급의 품계를 뛰어 훈련원봉사(訓l鍊院奉事)가 되고 이어 선전관(宣博官).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연산군(燕山君) 4년 戊午(1498)에 모친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친 후 안주판관(安州判官)에 제수되어 성적 (聲績)이 높았었다. 9년 癸亥(1503) 6월 비첩 온금(婢妾 溫今)의 사건으로 박원종(朴元宗)과 연관되어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중종(中宗) 원년 丙寅(1506) 봄에 또 부친 상을 당하여 3년을 지낸 후 제주관관(濟州判官)에 보직되었다. 만기(滿期)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조정에 청하여 경상도 김해(慶尙道 金海)로 선비(先妣)의 묘소를 성묘(省墓)하는데 마침 왜인(倭人)들이 해안(海岸)을 침입 여러 고을을 연이어 함락시킴에 공이 몸소 나아가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당상(堂上)에 승진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그 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거쳐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재임중 12년 丁丑(1517) 12월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교체되고 전라좌수사(全羅左氷使)로 재임중 19년 甲申(1524) 12월 역시 탄핵을 받고 체임되었다. 24년 己丑(1529) 4월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재임중 왜구(倭寇)가 자주 변방을 노략질하는데 그에 대처하는 군기(軍機)에 실수가 있어 파직과 아울러 동래(東萊)에 유배(流配)되었다. 26년 辛卯(1531) 가을에 왕의 특명(特命)으로 방면(旅免)되어 다시 오위장에 제수되었더니 동년 겨울 양산군수(梁山郡守)로 나가 이듬해 가을에 노환(老患)으로 사직하고 김해(金海)로 돌아왔다.
중종(中宗) 28년 癸巳 2월 23일 향년 64세로 졸하니 이듬해 甲午(1534)봄에 김해(金海)고을 주촌산(酒村山)서쪽 기슭 자좌(子坐)에 장례를 모시었다.
그해 겨울에 부인 윤씨(尹氏)께서 돌아가셔 공의 묘소 동쪽에 합장하였다.
배위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초(超)의 따님으로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봉종(奉宗)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지냈고, 2남 서종(緖宗)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의주(義州) , 전주판관(全州判官) , 흥해군수(興海郡守) , 전옥서주부(典獄署主簿) , 경산(慶山) , 하동현령(河東縣令)을 지내고 만년에 김해 불암(金海 佛巖)에 강정(江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요하였는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奈使) 면앙 송순(俛仰 宋純)과 경상도선위사(慶尙道宣慰使)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이 각기 시(詩)를 지어 전하고 있으며, 3남 윤종(胤宗)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奈)로 재직중 양종선과(兩宗祥科)를 부활하지 말것을 상소(上疏)로서 청하고 그 후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을 지냈으며, 따님은 청송심의공(靑松沈義恭)에게 출가하였다.
공께서 들아가신 10여년 후 명종(明宗) 초기에 대제학(大提學) 기재 신광한(企齋 申光漢)이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그 후 5대손 기수(耈壽)가 묘표(墓表)를 짓고, 눌인 노상직(訥人 盧相程)이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육천 안붕언(育泉 安朋彦)이 또 묘표를 지어 지난 乙卯(1975) 3월에 묘비를 개수(改竪) 하였다.
※朝鮮王朝實錄 墓碣銘. 嘉鑛譜.
[입력: ryuj 09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