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주요 세거지
문화류씨의 유래와 역사
문화류씨 주요 세거지
문화류씨(文化柳氏)는 시조 류차달(柳車達)이 황해도 유주(儒州) 구월산(九月山)에서 가문을 일으키고 자손들도 그곳에 세거하다가 고려가 개국하자 당시 수도인 개성(開城)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고려가 망하자 시랑공파(侍郞公派) 11세 류당(柳당)의 손자 류광수(柳光秀) · 류광원(柳光遠) 형제는 지금의 청원군(淸原郡) 남이면(南二面) 등등산(登登山)으로 은거하였고 후에 류광원(柳光遠)은 옥천산(沃川山)중으로 은거하여 후손이 청원군(淸原郡) · 옥천(沃川) 일원에 집단 세거하였다. 장령공파(掌令公派) 13세 류희(柳羲)가 초계군(草溪郡) 성산리(城山里)로 낙향, 후손이 그곳에서 세거하며, 곤산군파(崑山君派) 14세 류번(柳蕃)은 고려말에 조선개국파(開國派)에게 몰려 유배되었다가 후손이 대구(大邱)를 중심으로 칠곡(漆谷) · 경산(慶山) 등지에 세거하며 일부는 남원(南原) · 구례(求禮) 등지로 이거하였으며, 23세 류창무(柳昌茂)의 자손은 밀양(密陽) · 김해(金海) · 하동(下東)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문평군파(文平君派) 13세 류소(柳沼)는 청주(淸州) 수락동(水落洞)으로 낙향하여 주로 청주(淸州)에 세거한다.
조선조에 출사(出仕)한 13세 류관(柳寬)의 후계는 수도인 한양(漢陽)에서 살다가 18세 류용공(柳用恭) · 류용강(柳用剛)이 영암(靈岩) 모산리(芽山里)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후손 중 일부는 여수(麗水) · 고부(古阜) 등지로 이거하였다.
18세 류용량(柳用良)의 아들 류몽정(柳夢鼎)의 후손은 충주(忠州) 노은면(老隱面)으로, 18세 류용겸(柳用謙)의 아들 류몽주(柳夢周)는 황해도 백천군(白川郡) 류천면(柳川面)에 이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14세 류계문(柳季聞)의 후손은 양평(楊平) · 광주(廣州) · 부안(扶安) 등지에 세거하며, 류이문(柳異聞)의 후손은 안악군(安岳郡)으로 이거하였으며 일부는 보은(報恩)에 세거한다.
문숙공파(文肅公派) 17세 류영석(柳永錫)의 아들 류선종(柳善種) · 류덕종(柳德種) 두 형제는 제천(堤川)으로 이거하였고 후대에 죽산(竹山) · 서울 등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또 류희석(柳熙錫)은 제원군(堤原郡) 청풍면(淸風面)으로 가서 터를 잡아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祗候使公派) 16세 류인흡(柳仁洽)은 육신화(六臣禍)를 피하여 순창(淳昌)에 살고, 그의 아들 류문표(柳文豹)가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으로 이거하여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21세 류습(柳습)은 군위(軍威)로 이거하였으며 16세 류곡(柳곡)은 부여군(扶餘郡), 임천(林川)으로, 19세 종수(宗壽)는 진천(鎭川)으로 이거하였고 14세 류중의(柳仲宜)의 후손은 서울 · 안산(安山) · 시흥(始興) · 안양(安養)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좌상공파(左相公派) 16세 류자미(柳自湄)의 후손은 18세 류광선(柳光先)이 울산(蔚山)에 피적(被謫)되어 그곳에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었고 일부는 량산(梁山)으로 옮겨 세거하고 있다.
20세 류순장(柳順長)의 배위는 부친(父親) 방귀온(房貴溫)의 피화(被禍)로 아들을 데리고 나주(羅州)로 이거하였고 자손중 22세 류희달(柳希達)과 23세 류시화(柳時華)는 광산군(光山郡) 본량면(本良面)으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15세 류종(柳淙)의 후손은 포천(抱川)에, 17세 류순(柳洵)의 후손도 광릉(光陵)에, 18세 류응세(柳應祥)의 후손은 부여(扶餘), 16세 류사문(柳思問)의 후손은 진주(晋州)에 각각 세거하고 있다.
또 14세 류은지(柳殷之)의 후손은 한양(漢陽)에서 20세 류유순(柳惟順)은 사천(泗川)에 낙향하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17세 류용(柳墉)은 김해(金海)로 이거하였으며 그밖에 21세 류행(柳荇)의 후손은 공주(公州)에, 류혜(柳蕙)의 후손은 청양(靑陽)에 세거하고 있다. 15세 류사(柳泗)의 후손은 진양(晋陽)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검한성공파(檢漢城公波) 18세 류덕용(柳德容)은 화순(和順)으로 이거하였고 일부는 가평(加平)에 살고 있다. 14세 류영(柳潁)의 자손은 16세 류정손(柳正孫)이 탕정면(湯井面) 동산리(銅山里)로, 15세 류효강(柳孝綱)이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으로, 14세 류형(柳衡)이 김제군(金堤郡) 공덕면(孔德面) 황산리(黃山里)로 이거하여 터를 잡았으며 후대에 일부가 춘천(春川)ㆍ진주(晋州) 등지로 산거한 것으로 보인다.
정숙공파(貞肅公波)는 15세 류도강(柳道剛)이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이거하고 류수강(柳守剛)의 후손 20세 류한(柳漢)은 평산군(平山郡) 세곡면(細谷面)으로 이거하였다.
또 14세 류장(柳章)의 후손은 17세 류실(柳實)이 옥천(沃川)으로 이거하여 후손이 그곳에 살고 있으며 일부는 금산(錦山) · 무주(茂朱)로 이거하였다.
판사공파(判事公派)는 류응곤(柳應鯤)과 19세 류지정(柳之汀)이 칠곡(漆谷)에 살고 있고, 일부는 대구(大邱)에 이거하였다.
부윤공파(府尹公派)는 15세 류지(柳沚)가 고양(高陽)으로 이거, 후손이 그곳에 살며, 19세 류몽성(柳夢星)은 제주도(濟州道)로 이거하여 사계리(沙溪里) · 대정리(大靜里)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충경공파(忠景公派)는 15세 류좌(柳左)의 후손이 한양(漢陽)에 세거하다가 일부가 21세 류안복(柳安福)이 논산(論山)으로, 류광복(柳光福)이 해남(海南)으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15세 류경생(柳京生)의 후손은 16세 류혜(柳혜)가 청주(淸州)로 이거하고 19세 류신수(柳臣秀)가 서산(瑞山)으로 은거하여 후손이 세거하고, 16세 류적(柳績)은 안의(安義)로 이거하여 후손이 함양(咸陽) · 합천(陜川) · 거창(居昌) 등지에 세거한다. 류집(柳緝)은 곡성(谷城)으로 이거하였고 일부는 남원(南原)에 살고 있다. 15세 류강생(柳江生)의 후손은 16세 류신(柳紳)이 익산군(益山郡) 함열(咸悅)로 이거하여 살고 있다.
또 류한생(柳漢生)의 후손은 17세 류선장(柳善長)의 아들 류자영(柳自英) · 류자방(柳自芳)이 황해도로 이거하여 중화(中和) · 곡산(谷山)에 세거하며 류도장(柳道長)은 광주(光州)로 이거하고, 후대에서 무안(務安) · 여주(驪州) · 나주(羅州) 등지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류수장(柳壽長)은 거창(居昌)으로 이거하여 거창 및 의령에 살고 그 후손 류기(柳沂)은 옥천(沃川)으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지금은 대전(大田)에 많이 산다.
17세 류형장(柳亨長) 아산군(牙山郡) 배방면(排芳面)으로 이거하였다가 그 자손들이 천안(天安)에 거주하며 일부는 공주(公州) · 장수(長水)로 옮겨가 세거하고 있다.
16세 류륜(柳綸)은 남해(南海)로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류채(柳綵)의 후손은 서천(舒川) · 울주(蔚州)에 세거하며, 류작(柳綽)의 후손은 18세 류원(柳愿)이 부여군(扶餘郡) 세도면(世道面으)로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21세 류후준(柳後準)의 후손은 부안(扶安)에 세거하고 있다.
16세 류약(柳約)은 보은(報恩)으로 이거하고, 그 후손은 무주(茂朱) · 장수(長水) · 달성(達城) 등지에 세거하고 류인(柳絪)의 후손은 20세대(世代)에서 재녕(載寧) · 봉산(鳳山) 등지로 이거하여 세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