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산별곡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문화류씨의 유래와 역사

구월산별곡

구월산별곡(九月山別曲)은 문화류씨 찬가이다.

문화류씨 최초의 족보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영락보를 수보한 류영(穎)이 지은 것으로서, 현재 아쉽게도 영락보는 전해오지 않고, 그 후에 나온 가정보에 수록되어 있다. 귀한 자료이며, 집안의 자랑이다.

구월산별곡은 경기체가 형식으로 지어졌다. 아래에 백과사전의 설명을 참고로 제시한다

조선 세종 때 류영(柳穎)이 지은 경기체가. 류영이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를 처음으로 완성하자 이를 기념하고, 아울러 후손들에게 조상숭모·부모효도·형제화목·군자도리 등의 덕목을 가르치고자 지었다. 전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문화류씨세보≫ 가정보(嘉靖譜)에 실려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본에 따라 그 표기와 어휘가 서로 약간씩 다르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내용은 제1장에서 문화류씨의 발원지인 구월산과 삼지강(三支江)을 배경으로 한 유주(儒州)에서 시조 류차달(柳車達)로부터 고려조에 이어 여러 명현이 배출된 것은, 그들이 모두 선행을 쌓은 결과이니 방명(芳名)을 길이 전하되 조상의 뜻을 계승, 발전시켜 그들에게 욕됨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제2장에서는 부모님께서 낳아 길러준 은덕은 효성을 다 바쳐도 갚을 길 없음을 한탄하였으며, 제3장에서는 형제간에 우애로써 구족(九族)이 화목하게 되는 모습을 표현하였고, 제4장은 군자로서 안빈낙도의 생활로 은연자중하며, 인격을 완성하고 때를 기다려 움직여야 하며, 오직 임금께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강조하였다. 조선시대 보학사(譜學史)에 있어 문화류씨 문중에서 최초로 족보를 편찬한 뒤에 썼다는 점과, 유교사상의 일단인 조상숭모·부모효도·형제화목·임금에 대한 충성 등 인륜의 도리를 귀감으로 삼아 후손들을 훈도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다음은 구월산별곡의 전문과 현대어 풀이이다. (후자의 원출처를 알지 못해 밝히지 못했음.)

1장
九月山 三支江 儒州勝地
後梁末 前朝初 柳氏起家
文簡文正 貞愼章敬 代代封公
爲 積善流芳 景긔엇더ㅎ.니잇고
繼志述事 無忝祖風 再唱
爲 몃부니시니잇가

2장
父兮生 母兮育 子孫
出必告 反必面 綵舞
承順顔色 昏定晨省 永言思孝
爲 餘慶無窮 景긔엇더하.니잇고
欲報之德 昊天罔極 再唱
爲 어ㄴ.자ㄴ.ㅣ 갑ㅅ.오리잇고

3장
式相好 無相猶 兄弟眞情
摠和同 無爭訟 先祖遺書
佩服不忘 終身誦之 益篤其情
爲 親睦九族 景귀엇더ㅎ.니잇고
宜兄宜弟 天倫樂事 再唱
爲 于牆 나ㄴ.ㄴ마로리라

4장
採於山 釣於水 可以療飢
行無牽 止無泥 惟適所安
用行舍藏 安貧樂道 洋洋
爲 藏器待時 景긔엇더ㅎ.니잇고
思君不忘 一片丹心 再唱
爲 하ㄴ.리Δㅏ밋아ㄹ. 시리이다

1장
단군(檀君)께서 신(神)으로 화하여 들어간 구월산(九月山)과 도도히 흐르는 삼지(三支江)은 유주(儒州)의 경치좋고 이름난 곳.
중국의 후량말(後粱末)과 고려 건국초에 류씨(柳氏)가 이곳에다 가문을 일으키니,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을 위시하여, 문정공(文正公) 류경(柳璥), 정신공(貞愼公) 류승(柳陞), 장경공(章景公) 류경(柳墩)이 대대로 봉공(封公)되었도다.
아! 선행을 쌓는 집안은 자손대대로 경복(慶福)이 있어, 그 이름을 후대(後代)에 전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부조(父祖)의 뜻을 계승하고 업(業)을 잘 발전시키는 일이, 부조(父祖)가 떨쳐 일으킨 가풍(家風)을 욕됨이 없게 하느니,
아! 날까지 보태어 몇분이나 됩니까?

2장
아버지는 낳으시고 어머니는 기르시니, 자손(子孫)들이 떼지어 뛰어놀고 있도다.
남의 아들된 자는 나갈 때는 반드시 나간다고 아뢰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부모에게 얼굴을 보이며, 채의(綵衣)를 입고 너풀너풀 춤추도다.
웃어른 말씀 좇아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저녁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며, 새벽에는 문안 드려 길이길이 효를 다하느니,
아! 이렇게 함이 나 일신(一身)만 아니라, 자손에까지 미치어 넘치는 경복(慶福)스런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부모님의 은덕(恩德) 갚고자 하나 그 은혜(恩惠)가 하늘처럼 무궁(無窮)하여 갚을 바 모르겠도다.
아! 어느 잔에 갚을 수 있겠습니까?

3장
형제란 서로 아끼고 화목하며, 미워하고 시기함이 없는 형제가 참된 정을 가졌도다.
형제는 사이가 벌어졌다가 다시 화합하여지고, 송사로 다투는 일이 없으니, 선조들께 글로 써서 남긴 것이로다.
이렇게 화목하고 화합한 형제의 정은, 마음 속에 붙박혀 잊혀짐 없이 평생을 읊조리느니, 형제들이 모여 즐거운 놀이를 벌이도다.
아! 구족(九族)이 친목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형이여! 아우여! 형이 먼저고 아우가 뒤임은 하늘이 정해준 윤차(倫次)이어니와, 형제간의 즐거움이여.
아! 형제가 울안에서 싸우는 일 나는 모르겠도다.

4장
군자는 산에서 나물 캐고 물에서 고기 낚시질하므로 시장기를 면할수만 있으면,
군자는 가더라도 아무 끌릴 바 없고 멈추어도 아무 걸리는 바 없으므로, 오직 마음 편한대로 좇아 산다.
군자는 세상사람들이 날 알아 써주면 내 뜻을 실천하고, 세상사람들이 날 버리면 깊숙히 숨어 몹시 곤궁하게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天道를 지킴으로, 고독하고 냉정하고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 떳떳함이여.
아! 군자(君子)가 그물(器物)을 몸에 갈무리하고 때를 기다려 움직이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군자로서 임금님을 생각하고 잊지 않는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온 일편단심을,
아! 하늘이야말로 미처 알으시겠습니다.

* 유주(儒州): 구월산 아래에 있는 문화(文化)의 옛 이름.
* 삼지강: 삼지(三支)는 황해도 재령지역의 옛 이름. 삼지강은 대동강의 지류인 재령강.
* 후량(後梁, 907~923), 중국에 있던 나라.
*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 대승공 7세.
* 문정공(文正公): 류경(柳璥) 대승공 9세.
* 정신공(貞愼公): 류승(柳陞) 대승공 10세.
* 장경공(章景公): 류돈(柳墩) 대승공 11세.
* 봉공(封公): 높은 벼슬에 봉해짐.


다음은 일정하게 자수(字數)와 줄을 맞추고 뜻을 밝혀 해석된 것이다. (1장뿐)

구월산과 삼지강은 유주의 경치 좋고 이름난 곳
후량말과 고려초에 류씨가문 찬란하게 일어났네
문간공 문정공 정신공 장경공 대대로 봉공(封公)하고
아! 선행을 쌓아 그 향기 후세에 영원히 전하니
저 도탑고 아름다운 모습, 과연 보기 어떠합니까?
그 뜻과 업을 계승하여 가풍을 더럽히지 않으리
아! 유업 잇는 우리 후손, 정녕 많지 아니합니까?

[류주환 해석]

1.
구월산(九月山) 삼지강(三支江)은 유주의 승지(勝地)라.
후량말(後粱末) 전조초(前朝初)에 류씨(柳氏)집안 일으켰네.
문간(文簡) 문정(文正) 정신(貞愼) 장경(章敬) 대대(代代)로 봉공(封公) 하였으니
적선류방(積善流芳) 경(景) 긔 어떠 하니 있고.
뜻 잇고 일 이어 조상(祖上) 욕되게 않으리.
뜻 잇고 일 이어 조상(祖上) 욕되게 않으리.
위 날 좇아 몇 분이니잇고.

2.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키우시니 자손(子孫)도 많고 번성하도다.
나갈 때 아뢰고 돌아와 뵈오며 채색옷 입고 어린듯 춤추는구나.
어버이 낯빛 살펴 스스로 순(順)히 하고 저녁에는 잠자리 새벽에는 아침문안 길이길이 효도(孝道)를 하는구나.
여경무궁(餘慶無窮) 경(景) 긔 어떠 하니잇고.
갚고자 하는 덕(德) 하늘처럼 다함이 없네. 갚고자 하는 덕(德) 하늘처럼 다함이 없네.
위 어나제 갚사오리니잇고.

3.
사이 좋고 의혹 없음이 형제(兄弟)의 진정(眞情)이요
화합하고 다툼 없음이 선조(先祖)의 유풍(遺風)이니
마음에 새겨 잊지않고 종신토록 외우면 그 정(情) 더욱 돈독해지리.
친목구족(親睦九族) 경(景) 긔 어떠 하니 있고.
형제(兄弟) 사이 의 좋음은 천륜(天倫)의 즐거움.
형제(兄弟) 사이 의 좋음은 천륜(天倫)의 즐거움. 집안싸움 나는 마로리라.

4.
산(山)에 올라 나물 캐고 물에서 고기 낚으니 가히 기갈(飢渴)은 면하리로다.
나아가되 이끌림 없고 멈추되 구애됨 없으니 가는 바 오직 편안하도다.
세상일에 쓰이면 뜻을 펴고 물러가면 감추어서 가난에 편안히 하고
도(道)를 즐기니 홀로 고고(孤高)히 가네.
위 장기대시(藏器待時) 경(景) 긔 어떠 하니잇고.
임금 생각 일편단심(一片丹心) 임금 생각 일편단심(一片丹心)위 하날이사 알아나시리이다.

주석: 이 시가(詩歌)의 작자(作者) 양도공(良度公) 류영(柳穎)은 세종조(世宗朝)의 명신(名臣)으로서 당시(當時)에 영상(領相) 정숙공(貞肅公) 류정현(柳廷顯)의 주청(奏請)으로 세종(世宗)께서 류씨문보(柳氏門譜)의 축시(祝詩)를 하사(下賜)하게 된 것을 상(上)이 류영(柳穎)에게 대신 창제(創製)케 한 것임. 원문(原文)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독특(獨特)한 시가(詩歌)인 경기체(景幾體)인 바 형식(形式)에 구애(拘碍)됨이 없이 풀었음. 후렴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멋을 살려 원문(原文)을 살렸음.

[류주현 역(柳周鉉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