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작품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柳希亮 眞迹(1575~1628 경기관찰사.예조참판) ~중문사공파 감사공종중
작성자 : 류지세
작성일 : 2021.06.25 / 조회수 : 254
사진

柳希亮 眞迹(1575~1628  경기관찰사.예조참판) ~중문사공파 감사공종중


그림을 보여주며 그림 위에 전서로 제목

(사천장팔경도)을 붙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서를 써 준 진품(삼성 갤러리에 소장)


사천에 세상 일 모두 잊고 부르는 귀거래사 맴돌다

9.용문산 서쪽, 별천지 같은 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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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엄 집안 이씨의 선영 근처에 위치한 '사나사'풍경
구곡은 대개 개인들의 취향에 따라 설정되는 반면 팔경은 그 보다 좀 더 넓은 의미로 설정되기도 한다. 가령 지난 호에 다뤘던 여주팔경과 같은 읍치팔경이 그것이다.

그러나 팔경이라고 해서 모두 그처럼 넓은 지역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사대부들의 개인 소장인 별서(別墅)에 대한 팔경이 흔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팔경은 집 주인 스스로 짓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부탁해 자신이 머물고 있는 별서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한 별서팔경 중 경기도 양평 옥천면 일대에 설정됐던 사천장팔경(斜川庄八景)이 있다. 사천장은 조선중기 대제학에 올랐던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오봉 이호민(1553~1634), 현기 이경엄(1579~1652) 부자의 별서이다.

 그 장소는 현재의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일대이며 그들이 그곳에 별서를 지은 것은 광해군 4년인 1612년 2월에 일어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때문이었다.

 이때 김직재는 이호민의 형, 이사민의 사위였으니 이호민에게는 조카사위였으며, 더구나 무옥을 일으킨 당사자인 황해도 봉산군수였던 신율(申慄)은 그 자신의 사위였다. 이로 인하여 이호민은 무옥의 피해자이자 가담자가 되는 일을 겪으며 관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로부터 연안 이씨의 선영인 마유산 근처에 별서를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대략 1617년을 전후한 때였다. 당시 문장가들인 상촌 신흠(1556~1628), 택당 이식, 계곡 장유(1587~1638)와 같은 사람들도 대개 벼슬에서 물러나 신흠은 김포에 감지당(坎止當)을 이식은 양평에 택풍당 마지막으로 장유는 안산에 해장정사( 海莊精舍)와 같은 별서를 지었으니 나름 유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호민의 아들인 이경엄은 선영 근처에 사천장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곧 이어 팔경을 노래하지 않고 화원을 초대했다. 앞에 말한 이식의 경우 동계팔경을 설정하여 노래 한 후에 화원인 이신흠(1570~1631)으로 하여금 <동계팔경도>를 그리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경엄은 그 반대였다. 그 또한 이신흠을 불렀지만 그는 아직 사천장에 대한 팔경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팔경도를 그리게 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림이 완성되자 그는 글씨로 소문난 제교 유희량(1575~1628)에게 전서체로 사천장팔경도를 써 주기를 부탁했다.

 1617년, 이경엄은 이렇게 만들어진 팔경도를 들고 내로라하는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팔경시를 구했다. 이는 짬을 낼 수 없어서 사천팔경을 직접 와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팔경시를 쓰지 못하게 되는 아쉬움을 없앨 수 있었다.

 이경엄은 미리 팔경시를 부탁할 사람들을 지정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별서를 노래하면 그만큼 자기 소유의 별서가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부친인 이호민과 관계가 있는 당대의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펼쳐 놓고 시를 구한 것이다.

 이는 대단히 현명한 것으로 사천장과 가까운 여강에 살던 소암 임숙영(1576~1623)은 그 그림을 보고 <제사천장팔경도(題斜川庄八景圖)>라는 화제시를 지었는가 하면 만퇴헌 김중청(1567~1629)은 <사천장팔영(斜川莊八詠)>을 지었다. 물론 그들은 사천장에 다녀 간 것이 아니라 이경엄이 지니고 온 그림을 보고 지은 것이다.

 그것은 집안 아저씨인 월사 이정귀(1564~1635)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정귀는 앞에 말한 상촌 신흠·계곡 장유·택당 이식과 함께 ‘월상계택’으로 불리던 당대의 문장가이다. 그 또한 그림을 봤다. 그러나 그는 이경엄이 팔경도를 그리려 팔경을 비정하기 전에 미리 사천장 일대의 골짜기를 두루 다니며 팔경을 봤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천장팔경도시서(斜川莊八景圖詩序)>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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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작 ‘청정산수(양수리)                      
이정귀가 그림을 보고 말하는 팔경은 용수의 맑은 산 기운(龍峀晴嵐)·운봉의 흰 달(雲峯皓月)·사나사(舍那寺)에서의 신선 방문(舍寺尋眞)·침교의 권농(砧橋勸耕)·문암의 계곡(門巖洞天)·건지의 송백(乾支松柏)·군성의 새벽 고각(郡城曉角)·제탄의 저녁 돛단배(蹄灘暮帆)이다.  이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이 노래한 사천장팔영(斜川莊八詠)과 조금 다르다. 이수광은 문암동천·건지송백의 순으로 잡았으며, 운봉의 흰 달을 빼고 대신 용수청람(龍岫晴嵐), 용문산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넣어서 팔영을 완성했다. 이처럼 서로 조금씩 다를 수 있는 팔영은 선정은 물론 이정귀는 앞에 말한 시에서 팔경도에 대한 내용을 소상히 밝혀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나의 조카 이자릉(李子陵)이 늘 사천(斜川)의 경치가 좋다고 내게 자랑하였으나 나는 른바 사천이란 곳을 본 적이 없으며 팔경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자릉이 소매 속에 하나의 시권(詩卷)을 가지고 와서 내게 시를 적어 달라고 했다. … 내가 그 그림을 자세히 보니 전장 (莊)이란 것은 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팔경이란 것은 내가 이미 다 구경한 것이었다.

 을사년(1605, 선조38) 봄, 내가 경기 관찰사로서 영릉(英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여강(驪江)을 건너 벽사(甓寺)를 유람하고 지평(砥平)을 경유해 용문사에 투숙한 다음 내외령(內外嶺)을 넘어 사나암(舍那庵) 등의 절에 올라갔으며 다시 양근(楊根)을 거쳐 대탄(大灘)에 배를 띄우고 강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왔다. 이리하여 무릇 산중에 머무는 사흘 동안 거의 모든 곳을 샅샅이 유람하였는데 천암만학(千巖萬壑)의 온갖 경치들을 일일이 구경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조카가 비정한 팔경을 자신이 진작 구경한 곳이라고 하며 도연명(陶淵明)이 사천(斜川)을 돌아보고 지은 <사천십운시(斜川十韻詩)>에 빗대어 스스로도 십운시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이경엄은 사천장의 경영을 시작 할 무렵 도연명의 사천에 대한 시를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사천팔경도>가 들어 있는 시첩인 《사천시첩》 첫머리에 보이는 이경엄의 글이 그것을 말해 준다.

 만력 무오년(1618년) 가을에 내가 사천에 있었는데 우연히 《도연명집》을 보다가 이 시 <사천에서 노닐다(遊斜川)>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고금에 일치함을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 떠 스스로 귀거래해 은거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부친 이호민 또한 본디 마을이 사나였음을 말하고 후에 도연명의 사천을 따라서 사천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들의 선영이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사나사(舍那寺)가 지척이다. 그리하여 불교적 이름으로 지어진 사나마을을 그들이 고쳐 사천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천팔경도>는 현재 삼성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