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맹주 ( 盟主 ) 였던 백천 ( 百泉 ) 류함 ( 柳涵 ) 선생이 524 명의 의병을 이끌고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 화의소식을 듣고 내려와 서암 산중 환산동 ( 環山洞 ) 에 한 칸의 죽정 ( 竹亭 ) 을 짓고 은거했다 .
“ 환산정 ( 環山亭 )” 이란 정자 이름은 백천 류함 선생의 큰 사위인 정직 ( 鄭稷 ) 이 백천 류함 선생의 행적 ( 行蹟 ) 에서 처음 밝혀져 구전으로 내려오던 중 17 세기 중반 백천 류함 선생의 5 대 종손인 도곡 ( 道谷 ) 류정운 ( 柳鼎運 ) 선생이 환산동 ( 環山洞 ) 죽정 ( 竹亭 ) 주변에 기거할 때 원교 ( 圓嶠 ) 이광사 ( 李匡師 ) 선생은 도곡 류정운 선생 집에 하룻밤을 머물면서 백천 류함 선생의 생애 , 학문 , 의병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 감복하여 우국충절 ( 憂國忠節 ) 의 죽정 ( 竹亭 ) 에 올라가서 갈필 ( 渴筆 ) 로 “ 환산정 ( 環山亭 )” 이란 편액 ( 扁額 ) 의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
그 후 죽정 ( 竹亭 ) 이 무너지고 풀만 무성한 자리를 보곤 후손들이 가슴 아파 하며 힘을 모아 1896 년 정자를 중건하고 , 원교 ( 圓嶠 ) 이광사 ( 李匡師 ) 선생의 갈필 ( 渴筆 ) 작품의 편액 ( 扁額 ) 을 걸어 그 후로 환산정 ( 環山亭 ) 이라 부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