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조선 개국과 이성계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613

1대 태조 이성계


 신의왕후 한씨 : 6남2녀 : 방우, 방과(제2대 정종) , 방의, 방간, 방원(제3대 태종) ,

                          방언, 경신공주, 경선공주

 신덕왕후 강씨 : 2남1녀 : 방석, 방번, 경순공주



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해서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으며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 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으며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에는 동북면 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이 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 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5월, 장마로 인해 물이 급격히 불어난 상황이 발생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고려의 몰락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가 세운 아홉 살의 창을 폐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세웠으며 또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라로 방출되었으며 이로써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성계는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실로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성계의 조선개국, 그 시작과 끝


처음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 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 째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 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 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 일기를 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