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7대 세조 - 왕으로 등극한 수양대군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753

7대 세조


수양대군 1417-1468(재위 1455윤.6- 1468.9 13년 3개월)


부인 2명 4남1녀


정희왕후 윤씨 : 2남1녀 : 덕종(의경세자)

(추존 왕인 덕종), 제8대 예종(해양대군),


의숙공주


근빈 박씨 : 2남 : 덕원군, 창원군


※추존왕(追尊王)덕종 : 추존 소혜왕후 한씨(제9대 성종 생모)


왕위찬탈의 조짐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 구도는 왕족의 대표격인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드는 고명 대신파로 나뉘었다. 당시 왕위를 노릴 만한 힘을 가졌던 인물은 수양과 안평 두 사람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왕의 건강이 악화되던 세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길러오다가 문종 때에 와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없는 단종이 들어서자 이를 노골화한 것이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는 대단해서 고명대신들이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해서 고명대신들은 수양을 견제하고자 비교적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안평과 손을 잡고 수양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자 결국 수양은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수양은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눈을 따돌리고자 이 거사를 단행하기 6개월 전에 명나라의 사은사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명나라를 다녀온 다음 곧바로 이 거사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거사가 바로 계유정난이다.


계유정난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났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김종서를 살해하고 나서 그 길로 입궐하여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이미 작성된 '생살부' 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왕으로 등극한 수양


그는 어린 시절에 진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27년)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도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가 곧 조선 제7대 왕 세조이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의 치세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배출소로 자리 잡았던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반면에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또한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 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과 정모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았다.

또한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 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또한 1460년에는 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고 호의 규모를 규제하기 위한 법전인 호전을 복구했으며, 이듬해인 1461년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 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경도 길주에서 일어 난 이 반란으로 한 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정 안정책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우선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또 한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기강을 바로잡았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측근 중심의 정치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일례로 계유정난의 공신이기도 하고 변방의 안정에 공이 많았던 양정이 세조의 퇴위를 희망하다 불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진 반면, 또 한 명의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을 살해케 했는데도 순종을 잘 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주고 끝내기도 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 정치를 폈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원상제의 도입


1468년에 탄생한 이 제도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이다.

그 외의 일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를 찾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는 왕자 시절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즉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 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정희왕후 윤씨


정희왕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하였으며, 처음에는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 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고,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덕종(의경세자)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 해에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제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