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10대 연산군의 폭정, 무오사화, 갑자사화,연산의 폭정, 폐출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744

10대 연산군


1476-1506(재위 1494. 12- 1506. 9)

부인 2명, 자녀 4남2녀


폐비 신씨 : 2남1녀 : 폐세자, 녕대군, ? 공주

? : 2남1녀 : 양평군, 돈수, ? 옹주


폐비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한 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나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 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훈구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함으로써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성격을 나타내는 두 가지 일화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 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 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 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사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 버렸던 것이다.


연산의 폭정과 폐출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의 업적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흥청의 내력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 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 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폭정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 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사림파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 말, 조선 초에도 간혹 쓰이긴 했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 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 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 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 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 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면 정주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 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 운동 내지는 정치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 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 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정신에서 비롯된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간의 상호 견제를 통한 새로운 신권 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은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조선 조정을 균형 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오사화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 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 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무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갑자사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 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 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 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 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 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