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사의견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종중 임원 5도적(盜賊)
작성자 : 류재균(夏谷)
작성일 : 2021.09.19 / 조회수 : 862


종중 임원
5
도적
(
盜賊
)



1.
퇴직후 종재
(
宗財
)
를 삼지돈으로 쓰는 임원



2.
왜곡된 종사
(
宗史
)
를 강요한 임원



3.
종원 배려
(
配慮
)
를 본인 권리로 착각하는 임원



4.
종중 물건을 본인 사물로 사용하는 임원









5.
종원 실적을 본인 공적으로 가로채는 임원


 



조조는 원소의
1/10
이 안되는 전력으로

관도대전

을 승리하고 원소진영을 접수하고보니 조조신하들이 전쟁중에 원소에게 간첩행위를 한 수많은 편지를 발견하고 조조가 폐배할 것 같은 전쟁에서 신하들이 한 행동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적과 내통한 편지를 소각하고 용서하니 그들이 더 충성심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위씨춘추

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본기에 황제로 기록된 왕은 조조 뿐이라니 종중
5
적을 용서해야하느냐
?
고민중이다
.



삼국지 본기에는 없고 삼국지 열전에 나오는 유비 손권 관우 제갈량 등처럼 종중 정사
(
正史
,
王史
)
에 없는 종중열전
(
列傳
,
野史
)
에 주인공인 되느냐
?
가 문제로다
.



(

참고문헌자료
: TV N
벌거벗은 세계사
28

: 9

21
일 밤
8

50
분 보시오
)



종중돈을 착복



하거니 동조하면서 안건은 무조건

반대하는

 

도적을 과연 용서해야 하느냐


?



문제는 조조처럼 용서해주어도 한동안은 뉘우치치 않는
×(

)
을 설득하고 오랜시간동안 기다릴 인격과 능력이 부족하면서 조조 흉내를 내는 것이 종중을 위하는 길인지 알 수 없다
.



요즘 선거철이라 네거티브가 활개를 치는데 당한 사람이 억울하여 성질내면 대부분 사람들이 성질 낸 사람에게 잘 못했다고 하니 종중임원이 개
(

)
보다 못한 행동을 하고 틀렸다고 지적하면 대부분 종원들이

어른에게 버릇없다

하는데 버릇 없다는 말을 듣고라도 문제를 제기해야하느냐
?
순종하면서
5
적에 동조하느냐
?
가 문제로다
.




참고문헌자료
: TV N
벌거벗은 세계사
27

: 9

14
일 밤
8

50
분 후기



소설 삼국지에 제갈량이 하늘을 읽고 화공작전으로

적벽대전

을 승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왕건이
912

3
차 나주해전에서 제갈량처럼 동남풍을 이용하여 막강한 견훤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는데 겨울에는 북동풍 부는 때이기에 백만대군의 조조는 북쪽에 있고

의 군과 남쪽에서 올라온
5
만의 손권
,
유비 연합군이 양자강 적벽에서 싸우게 되었고 유비의 책사 제갈량은 겨울철인데 여름 바람인 남동풍이 필요했고 제사를 지내고 법석을 떨며 남동풍을 이용하여 승리한다
.


 



왕건의 군사였던 태평
(
泰評
,
고려개국공신
3

,
무자보총목
113
쪽에는 진평
秦評
으로 등재됨
)
이 겨울철에 남동풍부는 날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



겨울철 서해상 바람은 북서풍이다
.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1
년에
1~2
번정도 남동풍이 분다
.
중국 화남지방에서 기압골이 북동진하면서 서해상에서 발달한 경우다
.



장보고 암살당한 이후에도 서남해 지방 일대는 해양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 900
년대 서남해 지방의 해양세력은 섬지역을 무대로 한

도서 해양세력

과 해안 육지를 무대로 한

연안 해양세력
(
무자보 총목
113

4
해황제
)”
으로 나뉘었다
.



왕건과 견훤이 싸웠던
912
년에 견훤은 직접 왕건의 군대와 맞섰다
.
견훤은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
(
전남 영암군 덕진면
)
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시켜 왕건이 나주세력과 협공하는 것을 차단했다
.



후백제 견훤의 군사력을 본 왕건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한 상황에 왕건은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
남동풍으로 화공작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



왕건과 태평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북서풍이 불었다
.



7
일째가 되던 때 갑자기 바람은 남동풍으로 바뀌었다
.



싸우지 않고 제사만 지내는 왕건의 계책이 무엇인가 두려워 공세를 취하지 못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견훤군은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



남동풍을 타고 불화살과 화약으로 공격하는 왕건의 전함에 견훤 함대는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그런데 정말 태평이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남동풍이 불었을까
?
그것은 아니다
.



배를 이용한 무역을 하던 개성을 근거지로 했던 왕건과 태평은 서해상에 나타나는 겨울철 기후와 특성을 파악하였고 장보고 피살이후 장보고 세력중에 견훤지역에 거주하였던

도서 해양세력

세력이 왕건을 도와주었고 염주
(
鹽州
:
지금의 황해도 연안
)
출신인 태평에게 덕진포에서 남동풍 부는 날을 알려준 것이다
.


 




조조이야기에서 왕건까지 이야기가 두서 없었습니다
.



고양공종중 류민성 회장님께서 대승공이야기를 모여서 해 보자고 하셨는데 답변을 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
대승공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흥률사 중수 상량문으로 다시
1300
년대 대승공
12
세 휘 보발 묘지명
,
대승공
10
세 휘 승 딸
(
權溥

)
묘지명
,
대승공
11
세 휘 돈 묘지명으로 이어지는데 제가 원한 것은 이야기 보다는 토론을 해야 삼국유사 내용을 정사로 접목시키자는 설득을 할 것인데 토론자들이 인정할지 모르지만 설득할 근거가 있는데 문제는 종중 어른이라고 이론이 딸리면

너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냐 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



--------



대승공 역사에 대하여 공부를 조금만 했다면 무자보 총목
114,115
쪽에 휘 류차달께서 수레
1
천대를 만들고 신군
(
神軍
) 1
천명이 도적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워 삼한을 통일한다는 내용을 보면




궁예가 양길에게
100
騎兵
을 받아 결국 양길을 쳤는데 왕건 휘하에 기마병
(
騎馬兵
)
마군
(
馬軍
)
대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있었으나 대승공이 말
1,000
필로 군량을 실어나르는 것이 아니고 가병 천명이 수레를 끌고 도적
(
견훤군
)
을 무찔렸다는 것이고




작제건이 서해안 해적 노략질을 막았다는데 장보고 청해진 병력이
1
만명으로 작재건이 만명 사병이 있었다면 왕건아버지가 궁예에게 귀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내용을 모르는 임원이 있어 제가 설득하려하면 순수히 인정할지 의문입니다
.




912~914

3
차 나주전투의 덕진포해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