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사적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義兵將 百泉 柳涵先生 倡義碑
작성자 : 류정훈
작성일 : 2024.02.08 / 조회수 : 99
첨부파일 SG1033522.JPG


義兵將 百泉 柳涵先生 倡義碑



공의 나이
49
세 갑자년 이괄 변란
(
李适變亂
,1624)
에 족손
(
族孫
)
백석
(
白石
)
류집
(
柳楫
)
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양호
(
兩湖
)
로써 근왕
(
勤王
)
의 계획을 세웠고
,

공의
52
세 정묘호란
(
丁卯胡亂
,1627)
에는 조카 류응량
(
柳應良
)
과 함께 전라도
(
全羅道
)
에서 의병을 일으켜 구국충정을 높였다
.
그 후 민족의 통사 병자호란
(
丙子胡亂
,1636)
에는 임진왜란
(
壬辰倭亂
)
때 평양
(
平壤
)
에서 순절한
백형
(
伯兄
)

(

)
이 썼던 보검
(
寶劒
)
을 차고
,
화순
(
和順
)
에서 거의
(
擧義
)
하여 맹주
(
盟主
)
로서 의병을 이끌고 청주
(
淸州
)
까지 올라갔다가 화친
(
和親
)
의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돌아왔다
.



1636

12
월 병자호란
(
丙子胡亂
)
이 발발 했을 때 공은 이 고장 화순에서 다음과 같이 거의
(
擧義
)
를 주도 했다
.



숭정
(
崇禎
) 9
년 병자
(
丙子
, 1636)

12

24
일 한밤중에 관아
(
官衙
)
사내종이 문을 두들기며 서신을 주었다
.
서둘러 열어보니 다른 말을 한 것은 없고
,
다만

일이 급하니 빨리 왕림하시오
.[
사급천왕
(
事急


)]”
라는 네 글자만 있을 뿐이었다
.
바로 일어나 엎어질 듯이 관에 도착하니 류훤
(
柳萱
)
현감이 문에 나와 맞아드리더니
,
한 봉서
(
封書
)
를 보여주는데 통유교문
(
通諭敎文
)
이 남한산성 포위된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
엎드려 몇 줄을 읽는데 목이 메어서 읽을 수가 없었고 겨우 목구멍소리로 아래까지 보기를 마쳤다
.

(

)
은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어서 보답하려 해도 몸 둘 곳이 없었는데 임금이 욕을 당했으니 신하된 자가 바로 죽을 때라 결심하고
,
그 밤으로 작성한 거의격문
(
擧義檄文
)
을 여러 고을에 전달하게 했다
.
동틀 무렵 집에 돌아와 가묘
(
家廟
)
에 예
(

)
를 올린 뒤 슬하
5
형제 지성
(
之性
)
지기
(
之起
)
지서
(
之瑞
)
지화
(
之和
)
지혜
(
之惠
) 6
부자가 함께 국가에 몸 바칠 것을 보검 앞에서 맹세했다
.
류훤 현감과 의논하여 객사 밖에 의병청
(
義兵廳
)


설치하고
,
한참을 앉아 있으니
,
시골 유생 조수성
(
曺守誠
),
조엽
(
曺熀
),
최명해
(
崔鳴海
),
임시태
(
林時泰
)
여러 공들이 각각 자기 집의 사내종
[


]
들을 거느리고 왔다
.
맏아들 지성
(
之性
)
에게 의병청
(
義兵廳
)
을 지키게 하고
,
둘째아들 지기
(
之起
)
는 문묵
(
文墨
)
을 주관하게 하였다
.

(

)
은 화순

·
능주
·
남평
·
나주
·
광주
·
동복
에 절의 높은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15
일간 훈련과 전열을 가다듬고
,

남의병청
(
湖南義兵廳
)
모의유사
(
募義有司
)
족손 백석 류집
(
白石柳楫
)
과 긴밀히 내통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

(

)

맹주
(
盟主
)
로서
524
명 의병
(
義兵
)

1637(
정축
)
년 정월
11
일날 이끌고 화순을 출발하여 여산
(
廬山
)
에서 호남의병청 오현
(
柳楫
,
崔蘊
,
梁曼容
,
李興

,
李起

)

과 만나 회의를 마치고
,
진격하다가
청주
(
淸州
)
에 이르러서 화의
(
和議
)
의 소식을 접하자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사배
(
四拜
)
를 올리고
2
월 초
4
일 엄동설한 중에
40
일간의 의병활동을 그치고 환향
(
還鄕
)
하여 방
1
칸의 환산
(
環山
)
초정
(
草亭
)
을 짓고 절속
(
絶俗
)
하였다
.

!
슬프다 때를 얻지 못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이 나라의 장래를 어찌하랴
!
모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백천공
(
百泉公
)
또한 강개한 뜻을 시로 읊었으니
回首鯷岑白日寒 胡氛餘氣暗長安 何當携我堂堂士 縛取呼韓帳下看
(
머리 돌려 제잠을 보니 한낮이 차갑고 오랑캐 조짐 남은 기운에 서울이 어두운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당당한 선비 이끌고 가서 결박하여 취한 호한야 를 막하에서 볼거나
)
창의
(
倡義
)
사실
(
史實
)
은 백천유집
(
百泉遺集
)
병자거의일기
(
丙子擧義日記
),
호남창의록
(
湖南倡義錄
)

1798
년 중간본
,
조선환여승람
(
朝鮮寰輿勝覽
)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




화순 동면 서성리 환산정
(
環山亭
)
은 공의 우국지한
(
憂國之恨
)
을 삭히던 곳으로 때때로 소요하며 시를 읊었다
.
공이 정자를 세우고 운
(

)
을 부쳤으니
庭有孤松階有菊 學來栗里晋先生 乾坤磊落違初計 山水幽閒托晩情 葉上春秋忘甲子 心中日月保皇明 歲寒後操其誰識 時與山翁和不平
(
마당엔 외로운 소나무 섬돌엔 국화 진나라 율리 사는 도연명에게 배웠네 세상이 시끄러워 처음 계획 어긋나니 산수 그윽한 곳에 만년의 정 의탁 했네 봄가을의 나뭇잎에도 나이를 잊었지만 마음속엔 일월로 황명을 보존 했네 날 추워야 늦게 시듦 그 누가 안다 했나 산 늙은이 세월 따라 불평도 사그라지는 걸
)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