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1차 왕자의 난과 정종의 등극과 퇴위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70








조선 2대 왕 정종


 


2대 정종 영안대군 1357-1419(재위 1398.9-1400.11. 2년2개월)


 


부인 8명 15남 8녀


정안왕후 김씨(자식 없음)


성빈 지씨 : 2남 : 덕천군,


도평군 숙의 지씨 : 3남1녀 : 의평군, 신성군, 임성군,


함양옹주 숙의 기씨 : 4남1녀 : 순평군, 금평군, 정석군, 무림군,


숙신옹주 숙의 문씨 : 2남 : 종의군


숙의 윤씨 : 4남1녀 : 수도군, 임언군, 석보군, 장천군, 인천옹주


숙의 이씨 : 1남 : 진남군


 ? : 5녀 : 덕천옹주, 고성옹주, 상원옹주, 정산옹주, 함안옹주


 


  이성계의 세자책봉과 화근의 시작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 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 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 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 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 버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종의 등극 그리고 퇴위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 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 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 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 일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