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제2차 왕자의 난"과 태종 등극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68

3대 태종


 원경왕후 민씨 : 4남4녀 :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제4대 세종) , 성녕대군,

                          정순공주, 정경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 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제의 자리를 확보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 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태종의 등극


세제로 책봉된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 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 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종의 업적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의 정비로 고려잔재 완전청산.

2. 군사 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의 안정.

3.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

4.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 김.

5.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둠.

6. 과거 제도에서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 련.

7.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체, 초파일제 등을 폐지시킴.

8. 문묘 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함.

9.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켜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임.

10.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킴.

11.왜인 범죄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

12.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김.

13.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킴.

14.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


민무구형제의 옥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를 통해 이른 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 사건이다.


옥발생 후의 진행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 공신녹권을 빼앗음-직첩을 수취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에 유배 시킴-1413년 자진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옥사 종결


육조직계제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거북선 개발에 대한 추측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부터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 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 책이었을 것이다.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전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 따 설치되었다.


한양으로의 천도 내력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 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 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후로 한양은 5백 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경왕후 민씨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서 1365년 여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382년(우왕8년)에 방원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그녀는 1400년 2월에 방원이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으로 정빈에 봉해졌으며 이 해 11월에 방원이 조선 제3대 왕에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태종보다 두 살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보 덕분에 방원은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를 혁파하고 그들의 군 장비를 불태울 때 그녀는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거사 직전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어 선수를 치도록 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는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불화는 우선 궁녀 문제에서 출발하여 태종의 후궁 간택 문제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왕비의 동생 민무구 형제 사건으로 불화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태종은 외척의 권력 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민씨는 4남 4녀를 낳았으며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의 왕 자들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의 공주가 그녀의 소생이다. 그녀의 능은 헌릉으로 태종의 묘와 함께 쌍을 이루며 현재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남아 있다.


양녕대군 


1394년(태조3년)에 태어난 양녕은 태종 이방원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 자는 후백, 부인은 광주 김씨 한로의 딸 김씨였다. 양녕은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이 잦았고 사냥이나 풍류를 좋아해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가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동생 충녕이 왕이 된 이후에도 감찰 대상이 되긴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세종과는 지극히 우애가 깊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가 있었지만 세종에게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명을 누리다가 1462년 67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강정이다.


효령대군 


효령은 1396년(태조5년)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보, 자는 선숙이었다. 부인은 정역의 딸 예성부부인으로 그녀와 슬하에 6남 1녀,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효령은 양녕이 세자에서 폐위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한 때 자신이 세자 자리를 넘겨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동생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1407년(태종8년)에 효령군에 봉해졌고 14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이 후 출가한 뒤에는 불도에 전념하여 1435년 회암사 중수를 건의하였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로 활동하기도 했다.


1465년엔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언해하고 그 해 '원각경'을 수교하기도 했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치며 91세까지 살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여섯 왕의 연고 존친으로서 극진한 존경과 대우를 받았으나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왕들의 보호 아래 꾸준히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시호는 정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