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4대 세종대왕의 등극 배경과 업적, 왕자들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1,200

4대 세종


소헌왕후 심씨 : 8남2녀 : 향(제5대 문종), 수양대군(제7대세조),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세종의 등극 배경


태종은 일찍부터 왕권 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녕을 세자로서 신뢰하지 않았다.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곧 네 번 째 선위 파동으로 이 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태종이 일방적으로 세자를 폐한 것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 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녀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4대왕 세종이다.


폐세자 사건과 관련한 야사에의 실록


기록 양녕은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고의적으로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일삼아 태종의 진노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양녕이 부왕 태종과 모후가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내어줄 방안을 모색하는 소리를 엿듣고 그 때부터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양녕은 자신의 스승이 처음 오는 날 그 앞에서 개 짖는 시늉을 했는가 하면 공부 시간에도 동굴 뜰에 새덫을 만들어 새잡기에만 열중했고 또 조정의 하례에 참석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녕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궁궐을 월장해 기생을 찾는가 하면 남의 집 소실을 낚아채기도 했다고 한다.


세종의 업적


집현전을 설치해 그곳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 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기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세계 최초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단 이런 학문적인 사업에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 또한 심혈을 기울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어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에 편중하지 않고 군사 훈련, 화기의 개발, 성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세종은 박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또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불서 번역 사업을 펼치는 한편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섬기게 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의 시조묘를 사전에 올려 제를 올리게 하였다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관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 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정인지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 충녕군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지고 이듬해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8월에 내선을 받아 세종이 즉위하자 12월에 왕후로 책봉되어 공비로 불려졌다. 하지만 1432년에 중전에게 별칭을 붙이는 것이 관습에 없다 하여 공비라는 호칭은 없어지고 그냥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 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청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폐비 사태는 면하였다.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향(문종)을 비롯하여 수양(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등 아들 8형제와 정소, 정의 등 딸 2자매가 그들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1446년 52세로 죽었으며, 그녀의 능은 영릉으로 세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 씨의 소생의 화의 1명, 신빈 김씨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이었다. 이들 중 소헌왕후 소생인 향과 수양은 등극하여 문종과 세조의 묘호를 얻는다.


안평대군


1418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 등이다. 1428년 안평 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하였고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권신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양대군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했으나 이듬 해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서풍은 고려 말의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과 각첩으로 전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광주구 영릉터에 있다가 현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놓은 '세종대왕 영릉신도비'의 비문이 대표적이다


임영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구이며, 자는 헌지이다. 1428년 대광보국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안평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임영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 원윤이 되었으며,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 제작을 감독하였고, 1450 년(문종1년)에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광평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 째 아들로 이름은 여, 자는 환지이다.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광평은 '효경', '소학', '사서삼경', '좌전' 등에 능통하였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 ,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 번째 소생인 방번에게 봉사손으로 입양, 아버지 세종과는 오촌지간이 되어 왕가의 종실이 되었다. 이 해에 새로 개척한 북방 육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 교화를 위하여 한양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때 종성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지만 아깝게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금성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 째 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여덟 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두 번 째 소생인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 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삭녕에 유배당했다. 이 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1791년(정조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평원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 째 아들로 이름은 임, 자는 진지이다. 1434년 8세에 평원대군으로 봉군되고 1437년 종학에 입학, 호군 홍이용의 딸과 결혼했다. 이 후 학문에 진력하다가 1445년 1월 두창(천연두)으로 죽었다. 광평대군이 죽은 이듬해 닥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종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으며,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세종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의 억불정책은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 째 아들인 제안대군 현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영응대군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 째 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