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6대 단종-그 파란만장한 삶과 수양대군(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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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단종
정순왕후 송씨 : 후사 없음
단종의 탄생과 세손으로의 책봉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 왕자를 분만하게 되었는데, 난산이라 간신히 아이를 낳긴 했지만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다. 태어난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윈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 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 된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 때 홍위의 나이 열 살이었다.
왕위찬탈의 조짐과 왕의 죽음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렀고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 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간의 세력 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 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
계유정난으로 고명 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 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하였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난다.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가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 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 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 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숙종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계유정난의 배경과 후세의 평가
백관이 말하기를,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 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반증 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대군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수양은 자청해서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만약 의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 허를 찌르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 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단종 복위 운동
세조 즉위 4개월 만에 발생한 단종 복위운동은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
계 획: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
결과와 그 이유: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 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 한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두 번째 단종 복위 운동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 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일으킨다.
동기와 결말: 그는 종친 자격으로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양 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형제들 중 세조의 등극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정조 때 사육신을 비롯해서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의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