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13대 명종-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득세-을사사화,을묘왜변-순회세자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792

13대 명종


인순왕후 심씨 : 순회세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득세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7년(중종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소윤파의 대윤파 제거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 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 삼아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 세력들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시킨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또한 윤원형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 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 이 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의 악행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 시켜 사사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 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정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 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 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이량의 등장


윤원형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영입한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인 이량 역시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한 때는 자기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 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해서 명종은 그를 한 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지만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이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했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 되었다. 이 때가 1563년이었다. 


사회의 혼란


문정왕후의 악행으로 임꺽정의 등장 및 을묘왜변이 발생하였고 이에 중종 때 임시로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하여 외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문정왕후의 죽음 및 평화회복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것은 승려 보우와 윤원형 일파였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 판서에서 밀려나고, 다시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점차 질서를 되찾아갔다. 하지만 명종은 그 동안 너무 국정에 시달린 탓인지 병을 얻고 말아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명종의 나이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명종 즉위 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다. 이 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 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 되었다. 이 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 삼흉이라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 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 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12세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결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 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 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 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 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 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 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 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 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 했다. 당시의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에서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 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 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 가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 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횅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 하였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다.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인순왕후 심씨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4세 나던 154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16세 된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1568년 선조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났으며, 1575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명종의 능인 강릉에 묻혔다.


순회세자


순회세자는 1551년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부, 아명은 곤령이다. 1557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윤원형의 추천으로 참봉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이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호군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1563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서손자 하성군이 대통을 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