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회자료실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14대 선조-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북인과 남인
작성자 : 元泉柳永熙
작성일 : 2021.05.12 / 조회수 : 957

14대 선조


하성군 1552-1608(재위 1567. 7- 1608. 2 : 40년 7개원)

덕흥대원군이초’와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의 3남

부인 8명, 자녀 14남11녀

의인왕후 박씨 : 자식 없음

인목왕후 김씨 : 1남1녀 : 영창대군, 정명공주

공빈 김씨 : 2남 : 임해군, 광해군(제15대)

인빈 김씨 : 4남5녀 : 의안군, 신성군, 원종([추존왕 원종(정원군)-인조 父 ], 의창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순빈 김씨 : 1남 : 순화군

정빈 민씨 : 2남3녀 : 인성군, 인흥군,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

정빈 홍씨 : 1남1녀 : 경창군, 정정옹주

온빈 홍씨 : 3남1녀 : 흥안군, 경평군, 영성군, 정화옹주

 

  즉위초의 평화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 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 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을 삭훈 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 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을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 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했다. 사림의 분당 사태가 조정을 혼란시키자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 후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그러던 중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은 별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 그 때 좌의정 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의 세력은 실각하게 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실각한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과 남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삭탈관직 당한 서인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과격파인 전자를 북인, 온건파인 후자를 남인이라 했다.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의 발발

  야인들은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탕개가 주동이 된 이 반란으로 한 때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의 관할권이 완전히 장악 당하자 조정은 온성부사 신립과 첨사 신상절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다. 한 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이듬 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 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 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여 보름 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했고, 5월 2일에는 한양을 함락시켰다. 이 후 개성, 평양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양(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을 남겨놓은 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고, 이 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1593년 4월에 한성을 수복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했지만, 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신권정치의 구현

 

명종 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 행위를 선조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적인 당파 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 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분히 혼란상을 야기 시켰고, 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선조가 구상했던 당파 중심의 신권 정치는 근대적 정치 형태인 의회정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붕당정치의 바른 이해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 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당쟁, 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 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발발 이전상황

 

임진왜란이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 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1, 2차를 합쳐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케이초의 역'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

'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건 도요토미는 1589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수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하려는 목적은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가신들을 보내어 서로 통호할 것을 청하였다. 이 제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조는 찬탈시 역한 나라의 사신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하지만 정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의한 결과 관례대로 사신을 받기로 함에 따라 선조는 일본의 수교문을 받게 되는데, 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보서(사신의 서찰)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을 보류했다. 그리고 이듬 해 수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마도주 가신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후 몇 번에 걸쳐 일본은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구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1589년 9월경에 여러 차례 논란을 거친 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해 이 결정은 다시 지연되었고, 11월 중순 쯤에 겨우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 통신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에는 허성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신사로 갔다 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여야 했다. 서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략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 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전쟁설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성을 쌓는 등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 것마저 각 도에 명을 내려 중단시켰다. 이 후 선위사 오억령은 '일본이 다음 해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는 보고를 하기도 했지만 묵살당하고 도리어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왜인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 비게 되자 그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때늦은 조치였다.

 

전쟁의 발발

 

조선이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인하여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전무했던 것에 비해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 무술, 축성술, 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서양에서 건너온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 일본의 20여 만 병력은 모두 아홉 개의 부대로 나뉘어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일 본의 총 병력이 30여 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 병력의 3분의 2가 조선 침략에 투입된 셈이었다. 나머지 병력 중 약 10만여 명은 도요토미의 지휘 아래 나고야에 머물러 있었으며, 3만여 명은 교토를 수비하고 있었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은 불과 20일 만 인 5월 2일, 수도 한양을 내주고 말았다. 이 후 6월에 평양을 내주고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했다. 조선은 전라도 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라도 지역의 수군만큼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은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완전히 차단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6월 이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가 보낸 원군으로 전세는 조금씩 역전되고 있었다. 이듬 해 2월 평양성을 회복하고,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4월에 마침내 한양을 탈환했다. 이 때 한성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강원도와 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 위쪽의 서생포에서 진주 아래 쪽의 웅천까지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일본은 화의를 진행 시키는 한편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편 명은 일본의 화의 제의를 일단 수용하고 심유경을 도요토미에게 보내 2, 3년간 교섭을 진행시켰다. 화의 진행과정에서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무역허가 증명서인 감합인을 복원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보낼 것 등 네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잡아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명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 다는 내용의 봉공안을 내세워 명의 허락을 얻어냈다.

이에 1596년 명은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도장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분개하면서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략을 꾀하였다. 이 때문에 심유경은 명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몇 년간 지속되던 화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1597년 1월 15일 일본은 다시 15만 명의 협력으로 조선을 침입해왔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이 다시 침략 하자 명나라의 원군도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고 조선 땅은 또 한 번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한 때 임금이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동안 방비책을 마련한 조선군과 명군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군은 충청도를 넘지 못하다가 이듬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철군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겨우 퇴로를 열어 11월에 완전 패퇴했다. 이로써 6년 7 개월간의 조. 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 영향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을 거듭하던 사회가 이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가 극심해진다. 전화에 따른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어 170만 결이던 농토가 54만결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난 중에는 국가 재정 마련책의 일환으로 납속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 납속책은 소정의 곡물이나 돈을 받고 납속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 데, 이것의 시행으로 임진왜란 동안 많은 향리, 서얼, 천민, 노비 등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신분에 상관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었기에 조선 사회는 신분 제약이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져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전란 중에 조정에 불평을 품고 내란을 획책하는 사례도 있었다.

1594년의 송유진의 난, 1596년의 이몽학의 난이 당시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반란 사건으로 일반 민중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의 소실도 엄청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 미술품 등이 없어지거나 약탈당했다. 또 역대 실록을 보관 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하지만 전란이 꼭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전란의 영향으로 그동안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국방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타민족과의 갈등을 통해 애국심이 고취되기도 했다. 또한 병제를 재편하고 무기의 개량에 착수했으며 병술을 개혁했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예비군인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는 종래의 주무기인 활, 창, 검 등의 무기와 총통, 완구, 화전 등의 화기 외에 난 중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일본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조총을 제조하여 실전용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편 일본도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의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 생활을 피폐해져 있었으며,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 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로 도자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약탈해간 조선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거기에다 포로로 끌고 간 조선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 하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서적들을 가져가 일본 문화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병했던 명은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고,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그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은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이 지속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힘이 커지고 양반 중심의 정부의 힘이 약화되는 현상을 낳았다.

 

덕흥대원군 이초

 

중종의 아들로 창빈 안씨 소생이다. 1530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초, 자는 경패이다. 1538년 덕흥군에 봉해졌고, 1542년 정인지의 손자인 판종추부사 정세호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 등의 세 아들을 얻었으며 1559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이 후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음에 따라 그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즉위하여 조선 14대 왕 선조가 되었고, 1570년 덕흥대원군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에 있다.

 

의인왕후 박씨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이며, 1555년에 태어났다. 1569년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몸이 허약해 아이를 낳지 못했다. 1600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목릉이며 선조와 함께 묻혀 있다.

 

인목왕후 김씨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584년에 태어났다.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 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시킨 뒤 살해하였다.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 같은 패륜 행위는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 위치에 있으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훈민정음으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 후 1632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으로 영창대군 외에 정명공주가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는 그녀가 친필로 쓴 '보문경' 일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인목왕후 필적의 첩이 남아 있다. 죽은 후 선조와 의인왕후가 묻혀 있는 목릉에 묻혔다.

 

영창대군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에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06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의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또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을 까닭에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 할 생각을 품었다. 여기에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북파의 유영경 등은 선조의 생각에 부응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 생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달라는 유교를 남기는데, 이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을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소양강을 무대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 때 이이첨 등은 그 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하는 한편 김제남은 사사시켰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배된 후에 조야에서 끊임없이 그를 구원해 달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1614년 봄,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이 복구되었다.

 

임해군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공빈 김씨 소생이다. 157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진이다. 적출은 아니었지만 세자 책봉 당시에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기에 그가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해 근위병을 모집할 목적으로 함경도로 갔다가 반란군 국경인 일당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왜장 가토에게 넘겨졌다. 이 후 몇 번에 이송되다가 겨우 석방되어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원래 성질이 포악한데다가 포로로 잡혔다는 굴욕감에 사로잡혀 그 정도가 날로 심해졌다. 그래서 그 분을 발산하기 위해 술로 세월을 보냈고, 툭하면 상민을 구타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왜장 가토는 그가 포로로 있을 때의 친분을 이용해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띄워 내정을 탐사하려 하였다. 임진왜란 후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얼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대북파의 주청에 의해 유배 되었다가 이듬 해 죽임을 당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작 신원되었다.

 

정원군

 

선조의 다섯 째 아들이며 인빈 김씨의 소생이고, 신성군의 동복 동생이다.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좌찬성 구사맹의 딸과 결혼하여 능양대군, 능원대군, 능창대군 등을 얻었다.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으며, 인조반정으로 아들 능양대군이 왕이 되자 한때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많은 논란 끝에 다시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원종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때 그의 부인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은 장릉으로 경기도 김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