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文化)라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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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류씨의 유래와 역사

문화(文化)라는 곳

화는 황해도 구월산 동남쪽의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다. 서울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신천군과 삼천군에 걸친 일대인데, 그 지역은 단군조선 때 당장경(唐藏京),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초에 유주(儒州) 등의 명칭 변경이 있다가, 고려 고종 때 문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고, 이후 행정 단위의 변동은 있었지만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다가 1909년 신천군으로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1952년에는 삼천군이 신설되면서 절반 정도가 삼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초에 유주로서 주(州)로 승격된 것이 대승공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설득력이 있다.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인데,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문화의 별호(別號)는 시령(始寧)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문화현 편 세종 152 지리지 / 황해도 / 풍천군 / 문화현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인데, 고려에서 유주(儒州)로 고치어, 현종(顯宗) 9년에 풍주(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예종(睿宗) 원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고종(高宗) 46년 기미에 위사 공신 성균 대사성(衛社功臣成均大司成) 류경(柳璥)의 내향(內鄕)이므로 문화 현령관(文化縣令官)으로 승격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시령(始寧)이다.【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진산(鎭山)은 구월(九月)이다.【현의 동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한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신천(信川)에 이르기 23리, 서쪽으로 송화(松禾)에 이르기 35리, 남쪽으로 가화(嘉禾)에 이르기 27리, 북쪽으로 장련(長連)에 이르기 25리이다.

호수가 9백 50호요, 인구가 2천 1백 3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5명이요, 진군이 1백 29명이요, 선군이 1백 81명이다.

토성(土姓)이 2이니, 오(吳)·강(康)이요, 망성(亡姓)이 6이니, 노(盧)·구(仇)·나(羅)·표(表)·임(任)·영호(令狐)요, 내성(來姓)이 2이니, 류(柳)·김(金)이요, 속성(續姓)이 2이니, 이(李)【대흥(大興)에서 왔다.】 ·최(崔)이다.【모두 향리가 되었다.】 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僉議中贊文正公) 류경(柳璥)이다.【원종(元宗) 때 사람이다.】

땅이 메마르며, 산이 높고, 서리가 일찍 온다. 간전(墾田)이 7천 1백 85결이요,【논이 5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수수·팥·메밀·잇이다. 토공은 시우쇠·노루가죽·사슴가죽·돼지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수달피·족제비털·애 끼찌·다래·석이·기러기젓·지초요, 약재는 승검초뿌리·단너삼뿌리이다. 도기소가 1이니, 현의 북쪽 해장리(海庄里)에 있다.【하품이다.】

온천(溫泉)이 2이니, 하나는 현의 남쪽 15리 궁촌(弓村)에 있고, 하나는 현의 서쪽 15리 종달리(種達里)에 있으며, 역(驛)이 1이니, 연양(延陽)이다. 장장평(庄庄坪)이 현의 동쪽에 있고,【세속에서 전하기를, “조선 단군(朝鮮檀君)이 도읍한 곳이라.” 하나 곧 당장경(唐莊京)의 잘못 이름이다.】 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사왕사(四王寺)가 구월산 주봉(主峯)에 있고,【옛 성수 초처(星宿醮處)가 있다.】 월정사(月精寺)가 현의 북쪽에 있다.【교종(敎宗)에 붙이고, 전지 2백 결을 주었다.】


구월산은 북한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풍광이 수려하며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사달산이라고도 부르며 단군이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白岳)이란 곳으로 옮겼는데, 그 백악이 바로 구월산 아래라 한다. 단군이 이 산으로 돌아와서 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구월산은 민족의 신성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류씨는 뿌리가 그곳에 있기에 자연스레 구월산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구월산 남쪽 산록에 대승공의 묘소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류릉(柳陵)으로 불리며 전에는 절이었다가 경사루(敬思樓) 재실(齋室)로 변한 묵방재라는 건물이 묘소의 아래에 있었다. (이 재실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묘소의 위치가 해방 전 지명으로는 황해도 초리면(草里面) 흥학동(興鶴洞)인데, 2008년의 소식에 의하면 현재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종달로 동자구 먹대골이라 부르며, 현지 주민들은 "범묘" 또는 "효자묘"라 부른다고 한다.

<18세기 말의 황해도 지도이다(輿地圖). 구월산과 신천(信川) 사이에 문화가 위치해 있음을 볼 수 있다. 문화는 대략 지금의 삼천군과 신천군에 걸쳐 있었다.>
<구월산>

문화를 품고 있는 구월산은 천하 명산의 하나이다. 예부터 높진 않지만 산이 깊고 험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구월산은 우리 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산이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을 모시는 삼성사(三聖祠)와 단군대·어천석(御天石)·사왕봉(思王峰) 등 단군의 신적(神蹟)이 남아 있다.

황해남도 은률군과 안악군의 경계 지역에 있는 구월산은 궁흘산, 증산, 또는 아사달산, 삼위산 등으로도 불렸다. 높이는 954m, 넓이는 약 110㎢이며 제일 높은 사황봉을 비롯하여 오봉, 인황봉, 주거봉, 아사봉 등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톱날 같은 능선을 이루며 솟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