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柳)씨 일반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문화류씨의 유래와 역사

류(柳)씨 일반

본관은 문헌에 130여 본이 전하나 문화(文化) · 서산(瑞山) · 풍산(豊山) · 선산(善山) · 진주(晉州) · 전주(全州) · 고흥(高興) · 인동(仁同) · 배천(白川) 등이 현존한다. 모두가 문화류씨를 대종으로 한 분적종(分籍宗)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 않다.

류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때의 대승(大丞) 차달(車達)이다. 대승공은 고려 개국 당시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오르고 태조로부터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사명받았다고 한다.

류씨는 고려조의 벌족(閥族)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428명의 문과 급제자, 14명의 상신(相臣), 6명의 문형(文衡), 20여 명의 공신, 12명의 청백리를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따르면 5만 7467가구에 인구 33만 6839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9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50만 9077명으로 전국 인구 구성비 1.3%, 순위는 274성 중 제19위였다.


1. 문화류씨

시조 차달의 10대손 내지 12대손 대에서 14파로 크게 나뉘는데, 그 중 역사상 벼슬의 역력이나 인구수에서 대파(大派)는 충경공파(忠景公派:亮) · 좌상공파(左相公派:曼殊) · 하정공파(夏亭公派:寬) ·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元顯) ·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祗候使公派:仁修) 등의 5파이다. 충경공파에서는 류량이 조선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 · 우의정을 지냈고, 그의 5대손 관(灌)이 인종 때 좌의정을 지냈는데 명종 때 척족(戚族)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대윤(大尹:尹任) · 소윤(小尹:尹元衡) 사이의 정권쟁탈전에서 소윤 일파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량의 백씨파(伯氏派:府尹公派)에서 사원(思瑗)이 선조 때 임진왜란의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었다. 좌상공파에서는 만수(曼殊)가 조선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에게 참살 당하였다. 그의 현손 순(洵)은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6대손 전(琠)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는 등, 만수의 후손에서 상신이 많이 나왔다. 하정공파에서는 관(寬)이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 세종 때 우의정에 오르고 청백리에 록선되었다. 그의 9대손 상운(尙運)은 속종 때 대사간으로 특진되어 영의정을 2회, 중추부판사를 3회 지냈으며,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한편 관의 둘째아들 계문(季聞)이 세종 때 형조판서, 계문의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유명한 형원(馨遠)은 계문의 8대손이다. 그는 평생을 야인으로 마쳤으나, 당대의 대학자로서 당시 사회제도의 개혁과 토지개혁에 의한 경제적 혁신을 주장하였다. 중문지후사공파에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원(誠源), 정조 때 실학자로서 박제가(朴齊家) · 이덕무(李德懋) ·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한문신파사가(漢文新派四家)’로 불린 득공(得恭)이 나왔다. 그러나 광해군의 장인 자신(自新) 일가는 대북파(大北派)로서 인조반정 뒤에 크게 화를 입었다.


2. 진주류씨

시조는 차달의 9대손으로 고려 밀직사(密直使) 인비(仁庇)이며, 그의 손자대에서 익양공파(翊襄公派:惠芳)와 안간공파(安簡公派:惠蓀)로 대별된다. 또 고려상장군 정(挺)을 시조로 하는 토진주(土晉州)라고 하는 별파가 있다. 진주류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 문형 1명, 공신 8명, 청백리 4명을 비롯하여 많은 무장을 배출하여 그 열력이 문화류씨에 버금가는데, 거의가 익양공파에서 나왔다. 익양공파에서는 순(珣)과 그의 아들 겸(謙) 부자가 다 같이 청백리에 올랐으며,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염(琰)은 순의 4촌이고 중종 때의 이조판서 빈(濱)은 겸의 5대손이다. 익양공파의 인물은 모두가 겸의 현손인 순정(順汀)과 진동(辰仝)의 후손이다.

순정은 중종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고 그의 아들 홍(泓)과 조카 영(濚)도 역시 중종반정의 공신이며, 조카 부(溥)는 중종 때 좌의정, 11대손 엄(儼)은 영조 때 문장가로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한편 진동은 부제학 .공조판서를 역임했는데 문한(文翰)으로 유명하다. 그의 후손에서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형(珩),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琳), 숙종 때의 공조판서 혁연(赫然), 경종 때 부총관 취장(就章)을 비롯하여 많은 무과 출신의 무장을 배출하여 무인(武人)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진주류씨의 유일한 대제학 근(根)은 고려 상장군 정의 후손이다. 숙종 때 남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은 이조참판 명견(命堅) · 예조판서 명천(命天) · 이조판서 명현(命賢) 형제는 근의 종증손이며, 이 밖에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죽은 이조판서 인숙(仁淑)이 있다.


3. 전주류씨

시조는 고려시대 사람 양재(良梓)이다. 전주류씨는 조선시대에 상당한 세력을 폈으나 사화 · 당쟁의 화를 크게 입은 씨족의 하나이다. 대표적 인물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영경(永慶)이다. 그는 임진왜란 뒤 북인(北人)이 집권하면서 대북(大北) · 소북(小北)으로 분파되자 소북의 영도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으나, 선조의 급서로 대북측이 밀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는 대북측에 의해 사사(賜死)당하고 그의 일가는 멸족되다시피 하였다. 즉 영경의 세 아들 열(悅) · 복(裁) · 제(悌)와 조카 성(惺) 등도 참화를 입었으며 가산마저 몰수당했으나 그의 손자 정량(廷亮)만은 참화를 면하고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 뒤에 도총관을 지냈다. 영경의 형 영길(永吉)은 선조 때 경기도관찰사 ·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성리학자로도 유명하다.


4. 풍산류씨

시조는 고려시대의 호장(戶長) 절(節)이다. 풍산류씨의 대표적 인물은 조선 중흥의 명상(名相)으로 일컬어지는 성룡이다. 그는 명종 때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중영(仲落)의 아들이며 임진왜란 때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와 영의정으로서 전쟁을 주도하였다. 그의 형 운룡(雲龍)도 임진왜란 때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고 원주목사를 지냈으며, 아들 진(袗)은 지평, 진의 6대손 심춘(尋春)은 도정(都正)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 후조(厚祚)는 좌의정, 상조(相祚)는 병조판서를 지냈다. 또 운용의 중손 세명(世鳴)은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로 있을 때 서천군수(舒川郡守)의 부정을 탄핵, 파면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5. 서산류씨

시조 성윤(成潤)의 현손 숙(淑)이 고려 때 지추밀원사로서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 홍건적을 물리쳐 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을 평정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고, 첨의찬성사 · 예문관대제학 · 지춘추관사에 올랐다.


6. 고흥류씨

시조 영(英)의 6대손 청신(淸臣)이 고려 충선왕 때 찬성사 · 첨의정승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탁(濯)이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고 도첨의 정승에 올랐다. 탁의 아들 습(濕)이 태종 때 이조 · 예조 전서를 거쳐 세종 때 우군원수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고, 그의 6대손 몽인(夢寅)은 설화문학의 대가이다. 그는 이괄(李适)의 난 때 반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아들 약(龜)과함께 처형되었다. 이밖에 3 .1운동 때 순국한 관순(寬順)도 고흥류씨이다.


7. 선산류씨

시조는 고려시대 사람 원비(元庇)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희춘(希春)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선조 때 부제학 · 대사간 ·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부인 송씨(宋氏)도 손꼽히는 여류시인이었다.


8. 영광류씨

시조 언(店)의 손자가 예종 때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자환(子煥)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 3등에 오르고, 도승지 · 대사헌 ·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