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인맥

The Grand Assembly of the Moonhwa Ryu Clan

문화류씨의 유래와 역사

문화류씨 인맥

소감 총(寵: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 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琛)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문화류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언침(彦琛)의 후손에는 판관(判官) 안택(安澤:상호군 식의 아들)의 아들 관(寬: 하정공파(夏亭公))이 유명했다.

한편 판예부사(判禮部事) 공권(公權)의 둘째 아들 택(澤)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경(璥)이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와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등 4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문하(門下)에서 안향(安珦), 이혼(李混) 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경의 손자 돈(墩)은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만수(曼洙)는 위화도 회군 때 공을 세우고 일등공신으로 찬성사에 올랐다.

려조(麗朝)의 벌족(閥族)이었던 문화류씨는 리조(李朝)에서도 문과(文科) 급제자가 134명으로 상신(相臣) 9명, 문형(文衡) 4명, 공신(功臣) 9명, 청백리(淸白吏) 5명 등이다.

문화류씨의 세계(世系)는 시조(始祖) 류차달(柳車達)의 6대손인 소감 총(寵)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 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琛)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문화류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류차달의 10대손 내지는 12대손 대(代)에서 14파(派)로 대별(大別)되었는데, 그중 벼슬의 열역(閱歷)으로나 인구수로나 대파(大波)로 꼽히기로는 충경공(忠景公) 류량(柳亮)파, 좌상공(左相公) 류만수(柳曼殊)파, 하정공(夏亭公) 류관(柳寬)파, 검한성공(檢漢城公) 류원현(柳元顯)파, 중문지후사공(中門祗候使公) 류인수(柳仁修)파 등 5파이다.


1) 충경공파(忠景公派)

충경공파에서는 충경공(忠景公) 류량(柳亮)이 리조(李朝)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고 태종(太宗) 때 좌명공신(左明功臣)으로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었고, 그의 5대손인 송암(松庵) 류권(柳權)[충숙공(忠肅公)]이 인종(仁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류권(柳權)은 인종(仁宗)이 승하한 후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맡았으나,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척족(戚族)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대윤(大尹) 윤임(尹任),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사이에 정권쟁탈전(政權爭奪戰)이 가열되면서 소윤일파(小尹一派)에 의해서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그에 앞서 중종(中宗) 때 류권(柳權)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으면서 이궁(李芎)의 병조판서(兵曹判書) 임명(任命)을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 명종(明宗) 즉위 후 소윤일파(小尹一派)와 손을 잡은 이궁(李芎)이 우의정(右議政)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겸하게 되면서 사적인 원한을 푼 것이다. 이 무렵의 소윤(小尹)에 의한 일대 숙청이 그 악명(惡名) 높은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年)인데, 이 사화(士禍) 때 진주류씨(普州柳氏)의 이조판서(吏曹判書) 류인숙(柳仁淑)의 일가도 참화(慘禍)를 입었으며, 류감(柳堪) 대사간(大司諫) 전주류씨(全州柳氏), 류희춘(柳希春) 이조참판(吏曹叅判) 선산류씨(善山柳氏), 류경심(柳景深) 대사간(大司諫) 풍산류씨(豊山柳氏) 등등도 파직(罷職) 당하고 귀향 가는 등 사화(士禍)의 여파는 류씨(柳氏)들에게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 한편 충경공(忠景公)의 백씨파(伯氏派) 부윤공파(府尹公派)에서 문흥군(文興君) 류사원(柳思瑗) 좌윤(左尹)이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壬辰倭亂)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청병(請兵)을 위한 급고주문사(急告奏聞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를 다녀왔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명군(明軍)을 영남(嶺南)지방에 인도하는 등 전쟁 수행에 크게 이바지했다.


2) 좌상공파(左相公派)

좌상공파에서는 류만수(柳蔓殊)[찬성(贊成)]가 이성계(李成桂)의 혁명(革命)에 가담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 때에 방원(芳遠) 태종(太宗)에게 참살 당했다. 그의 현손(玄孫)인 노포(老圃) 류순(柳洵)[문희공(文僖公)]이 세조(世祖)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연산군(燕山君)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功臣)으로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에 올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다시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6대손인 우복(愚伏) 류전(柳琠)[문정공(文貞公)]이 또한 명종(明宗)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호당(湖當)을 거쳐 선조(宣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뒤에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고 시령부원군(始寧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만수(曼殊)의 후손(後孫)에서는 공신(功臣)이 많이 나왔는데, 단종(端宗) 때 청난공신(請難功臣) 숙(淑)[판서(判書)], 수(洙)[찬성(贊成)], 사(泗)[판서(判書)]의 3형제는 그의 손자(孫子)이며, 중종(中宗) 반정공신(反正功臣) 응룡(應龍)[이참(吏叅)]은 영의정(領議政) 순(洵)의 아들이다. 특히 류수(柳洙)[안양공(安襄公)]는 성종(成宗) 때 좌리공신(左理功臣)에도 올라 문성군(文城君)에 봉해졌는데, 무술(武術)이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世祖) 때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성삼문(成三問)의 나이 어린 손녀를 몰래 데려다가 숨겨 길러 며느리로 삼기까지 한 절신(節臣) 류자미(柳自湄)[감찰(監察)]는 만수(蔓殊)의 증손인데, 그의 아들 지[찬성(贊成)]는 성종(成宗) 때 좌리공신(左理功臣)이다. 한편 만수(曼殊)의 4촌 월정(月亭) 류정현(柳廷顯)[정숙공파조(貞肅公派祖)]은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3) 하정공파(夏亭公派)

하정공파에서는 하정공(夏亭公) 류관(柳寬)[문간공(文簡公)]이 태종(太宗) 때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여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세종(世宗) 때 궤장을 하사 받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고려사(高麗史)”를 수릉 찬진(撰進)했는데, 청백리(淸白吏)에도 록선(錄選)되고 학문(學問)과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자정승으로 유명한, 그의 9대손 약재(約齋) 류상운(柳尙運)[창간공(忠簡公)]은 좌랑 성오의 아들로, 숙종(肅宗) 때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고 대사간(大司諫)으로 특진되어 영의정(領議政)을 두 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세 번 지내는 동안 장희빈(張禧嬪)의 폐립(廢立)에 얽힌 당쟁(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직되고, 혹은 부처(付處)되기도 했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영조(英祖)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만암(晩菴) 류봉휘(柳鳳輝)는 류상운(柳尙運)의 아들이다. 류봉휘(柳鳳輝)는 이른바 “소론4대신(小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서 경종(景宗) 1년 세제(世弟) 영조(英祖) 책봉을 반대했고 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이 실현되자 왕이 병을 앓지 않는데 대리청정(代理聽政)케 함은 부당하다고 극간(極諫)하여 마침내 이를 철회케 하고 노론(老論)을 실각(失脚)시켰다. 그러나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노론(老論)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우의정(左議政)에서 면직(免職), 경흥(慶興)에 안치(安置)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한편 류관(柳寬)의 차자(次子) 계문(季聞)이 세종(世宗) 때 판한성부사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개성부 유수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권은 참판을 지내고, 계문(季聞)의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中宗) 때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한성부 판윤에 올랐는데, 유명한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1622~1673]은 계문(季聞)의 8대손이다.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저자인 그는 평생 야인(野人)으로 마쳤으나 당대(當代)에 이름을 떨친 대학자로서 당시 사회제도(社會制度)의 개혁(改革)과 토지혁명(土地革命)에 의한 경제적 혁신을 부르짖은 그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사상(思想)은 비록 결실(結實)은 못했으나 전근대(前近代)와 근대(近代)와의 교량적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4) 중문지후사공파(中門祇候使公派)

중문지후사공파에서는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학자로서 유명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낭간(浪O) 류성원(柳誠源)[충경공(忠景公)]과 정조(正祖) 때 실학자(實學者)로서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한문신파4가(漢文新派四家)”로 불린 영재(O齎) 류득공(柳得恭)을 낳아 빛난다. 성원(誠源)은 세종 때 급제하고 집현전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문지후사공파에서는 류자신(柳自新)[광해군(光海君)의 장인)] 일가(一家)가 대북파(大北派)로서 1689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크게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