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柳氏由來碑(문화류씨 유래비)
문화류씨의 유래와 역사
문화류씨 유래비(文化柳氏由來碑)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 대승공 류차달(大丞公柳車達)은 황해도 유주(儒州 文化縣) 태생으로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워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훈호를 받았다. 그 아드님 좌윤공 효금(左尹公 孝金)은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공이 나를 구해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 하였다. 그 후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 문정공 경(文正公 璥) 등 수대를 연이은 증시(贈諡)로서 고려조에 소위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벌족(閥族)으로 일컬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134인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인에 이르렀고, 시호(諡號) 22장이 내렸는데 그 중에 상신(相臣) 9인, 호당(湖堂) 5인, 청백리(淸白吏) 4인, 공신(功臣) 11인이 배출되었다. 국초에 청렴재상 하정 관(夏亭 寬), 사육신 낭간 성원(琅玕 誠源), 을사사화 때 강직대신 송암 관(松菴 灌),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 문흥군 사원(文興君 思瑗), 실학의 원조 반계 형원(磻溪 馨遠), 발해고 저자 영재 득공(泠齋 得恭) 등은 특히 드러난 분이다. 그리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한 유현(儒賢)과 충의효렬(忠義孝烈)로 정려(旌閭)와 복호(復戶)의 은전을 받은 분이 80여인에 이르고 무과 및 소과에 급제한 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듯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국가와 명운을 함께 한 우리 류씨는 고려 때 4대명족, 조선 때 8대성으로 일컬어 왔으며, 더욱이 문화류씨의 영락보(永樂譜)와 가정보(嘉靖譜)는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嚆矢)로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보학(系譜學) 연구의 세계적 문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은 고려사 및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국조방목, 증보문헌비고, 연려실기술 등 공가문헌(公家文獻)을 철저히 고증한 기록이다. 근세에 우리 류씨와 차씨 간에 동조이성(同祖異姓) 운운하였는데 이는 위서(僞書)를 오인(誤認)한 소치로서 근년에 제반 공가문헌에 의하여 사실무근임이 판명되었다. 우리 모두 전감후계(前鑑後戒)의 지혜를 되새겨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명문(名門)의 전통을 지켜 나가자.
文化柳氏大宗會(문화류씨대종회)